코감기가 들어서 일요일 아침에 이비인후과 의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의 경기도 제 2청사 앞을 지나오는데 가로수 단풍이 얼마나 예쁘게 물들었는지 투명한 가을 공기와 섞여서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사잇길로 들어가려고 천천히 운전을 하고 있는데 차 바로 앞에서 아이를 무등 태운 아빠 둘이서 출렁출렁 몸을 흔들며 걸어가고 있다.

힘차게 내딪는 아빠들의 걸음걸이는 역동적이었고, 공중에 높이 들린 아이의 조그마한 머리 위로는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나고 있었다.

아! 나는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면서 입이 귀에까지 걸려버린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여린 자기만의 키로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키만큼 높아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더욱이 아빠의 어깨는 무쇠처럼 단단하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갖 유머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 부부는 아들을 한번도 업어서 키우질 못했다.

아니, 어릴 때 저거 아빠는 아이를 등에 태우고 방을 기어다니는 놀이를 해주곤 했다.

그리고 곧잘 함께 엉겨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성이 차질 않는 것일까.

어릴 때 차를 타면 아이는 금방 잠이 들곤 했었다. 승용차를 타거나 전철을 탔을 때도, 처음에는 자지 않겠다고 뻗대던 아이가 어느새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내릴 때가 되면 나는 여지없이 아이를 깨운다. 잠에 잠겨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서 아직도 여물지 못한 아이의 발로 이 땅을 밟게 했던 것이다.

아이는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아주 어린 날에도 잘 깨어났고 비척거리면서라도 자기 발로 잘 걸어 들어갔다.

한번은 밀양에서 오빠가 올라와 남편의 차를 같이 타고 의정부로 들어왔다.

그 날도 아이는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예외 없이 아이를 깨웠다. 그런데 오빠가 내 손을 만류하시더니 아이를 당신의 등에 훌쩍 업으시는 것이 아닌가. 키 180센티가 거의 다 되는 외삼촌의 넓은 등에 업혀 있는 아이의 작은 몸피를 보자 나는 어쩐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릴 때는 이렇게 업어주어야만 했다. 잠이 겨운 아이를 넓적하고 편안한 등에 옮겨서 이렇게 성큼 성큼 옮겨주어야 했다. 잠 속에서 꾸는 아이의 꿈이 편안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넉넉하고 씩씩하게 잘 자랐고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는 중이다. 고 1인 지금, 키 175센티인 녀석은 빨리 180이 되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넓적하고 편안한 등에 업히고 싶은 이는 울 아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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