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실은 지금의 남편과 첫밤을 지내던 날, 내 입에 의해서 공개되어졌다.
이런 걸 밝히면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방해만 될 뿐이고, 상대방한테도 오히려 예의가 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난 날 하고자 했던 그 경험은 어쩌다가 실수한 것도 아니었고 타락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새로운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강렬한 필요에 의해서 기꺼이 선택된 일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아니 아직 남편이 되기 전의 이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동안 연락이 없었다. 평생을 같이 하기로 한 남자가 나한테 있어서 그토록 치열했던 경험의 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가 다시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애탕끌탕 하면서 좋은 날도 있고, 지지고 볶는 날도 있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가 갑자기 모범답안으로 흘러가버린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서 늦게나마 본격적으로 따지고 넘어가야할 항목이 몇 개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부실한 나는 남자들한테 결코 여성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단정을 내림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할 이성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자신의 가치를 평가 절하함으로 인해, 그로 인해서 생겨난 왜곡과 굴곡된 단정으로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고뇌의 양을 사정없이 부풀려놓는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내장산에서 돌아온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지는 그 남학생의 뜨거운 눈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내 몸도 함께 달구어져서 어쩔 바를 모르고 도망을 가거나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옆에 있고 싶어서 안달을 내곤했다.
한번은 찻집에 둘이 앉아 있다가 하숙집에 아무도 없다고 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골목 어귀에서 산 맥주와 안주 몇 가지를 풀어놓고 기타를 덩덩덩 쳤다. 빈 집의 말없는 침묵이 어둑씬하게 그와 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때 잠긴 목소리로 그가 그랬다.
“같이 이 방 쓰고 있는 놈 말이오. 애인이 있는데 오면 갈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내가 하루는 물어봤죠. 그래도 되냐구?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겠느냐고 말이요.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당신 누구를 죽을 만치 사랑해본 적이 있느냐고 그럽디다. 그 말을 들으니깐 그렇구나 싶었어요.”
그러면서 다시 기타를 덩덩덩 울렸다.
사람이 자기 철창에 갇혀 있으면 자신의 말만이 들릴 뿐이다.
나는 그때 그의 말을 이렇게 들었다.
“하숙집 친구는 그렇게 자유분방하지만,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나로서는 한 여자의 장래와 그의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방에서 혹시라도 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일세라, 문 바로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돌아 나왔다.
“나 배웅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설령 그의 생각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하더라도 그 아가씨처럼 말할 수 있었어야 했다. 나도 그 아가씨 같은 심정이었으니깐. 그러나 나한테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누구 앞에 내밀만한 그런 물건이 결코 못되었으니까 말이다.
여중 다닐 무렵, 이웃에 사는 고등학교 선생님과 친해져서 자주 그 집을 들락거리면서 알게 된 남자 고등학생이 있었다. 특히 선생님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수제자로 말씨도 서울말을 쓰고 행동거지도 시원시원하여 마음속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같이 다니던 친구가 그 남학생의 친구와 사귀게 되면서 나는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역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어쩌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농담처럼 그랬다.
“나 그때 오빠 좋아했었는데....”
그랬더니 그가 내 손을 덥썩 잡고는 놓아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잡고 얼마나 주무르는지 내 손이 흠뻑 땀으로 다 젖어버렸다. 그 때의 찝찝함이라니....... 그 남학생은 깔끔하고 나름대로 핸섬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 이후부터 갑자기 그가 싫어져서 대문 밖에서 손짓을 하면 나는 오히려 숨어버리곤 했다.
한번은 교회를 가느라고 밤에 집을 나섰는데 어떤 남학생이 잠깐만 이야기를 좀 하자고 그랬다. 나도 호기심이 동해서 그를 따라 둑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캄캄한 그믐날이어서 앞에 있는 남학생의 얼굴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 남학생이 한번만 안아보자는 것이다. 안돼요, 안돼, 이럴려고 한 것이 아니었잖아요. 나는 그의 인간성에 적극적으로 호소하면서 놓아줄 것을 간청했다. 다행히 그 남학생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남녀공학을 다녔던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우리반 반장 남학생을 좋아했다. 아주 툭박지고 강하게 생긴 촌놈의 전형으로 지금 생각해보아도 순수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쪽지를 주었더니 약속된 장소인 정미소에 그가 나와 있었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데 폐가처럼 어두컴컴한 정미소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남학생을 보자마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만나서 무얼 어찌 할 것인가? 그렇다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미안함과 자책감과 찝찝함이 어울어져서 어쩔 줄을 모르고 나는 그냥 내빼고 말았다.
크윽, 이런 말을 늘어놓으니깐 오히려 더 이상해지고 웃긴다.
어쨌거나 어린 날부터 강하게 화인(火印)되어버린 여성으로서의 마이너스적인 인식이 언제나 붙어 있어서 이렇게 상대방을 밀어내놓고도 도리어 버림받았다는 강한 피해의식에 오랫동안 젖어있었다.
“나를 결코 여성으로 드러내지 않겠다”
나의 영원한 우상이던 L을 내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해 술수를 부렸던 그 빼어난 전략은 결국 내 자신에 대한 부정과 부정이 극적으로 드러난 아주 명확한 사건이었다.
나는 인간이기 전에 먼저 한 여성이라는 사실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린 손바닥으로 대천지 하늘을 가리려고 든 것이었다. 그가 나를 버리고 허겁지겁 장가를 든 것은 (L이여, 이런 표현을 써서 대단히 미안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성에 대한 피력을 하려고 했는데 실연기(失戀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각고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통렬하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으니 그건 성이란 자기 자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이다.
자신한테 너그럽고 온유한 사람은 섹스도 자유롭고 부드럽다. 그러나 삶의 한 부분을 피하고 싶어 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섹스 역시 터부시되거나 오히려 질질 매달려서 끌려가기 쉽다. 섹스를 말할 때 자주 들먹여지는 사디즘, 마조히즘 같은 심리도 성 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깊은 속성으로 보통 때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이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성은 숨겨야 할 것도 아니고 피해가야 할 그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행위 중에 이보다 더 친밀하고 다정한 방식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온갖 피임법이 완벽하게 드러난 이 마당에도 여전히 책임감과 도덕성을 들먹여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애정표현 방법을 막으려 한다면 그건 횡포 중에서도 지나친 횡포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스킨십이 더해져야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성인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따뜻한 스킨십에 노출되어 있어야만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봉쇄해버리는 억압과 터부 때문에 매춘이 생겨날 공간이 발생하고, 더러운 성, 깨끗한 성으로 이분화되어지기도 한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면 중증 장애인이 아니라 설사 사지가 묶인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가 광대한 오르가즘이다. 내가 내장산의 그 남학생한테서 받았던 그 눈빛이란 어떤 것보다도 더 강열한 오르가즘의 극치였다. 그러나 그걸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왜 저런 눈빛이지? 나같은 인간한테 왜 저런 눈빛을 보내는가? 따지고 의심하고 도망가려고 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이 글을 쓰다가 나는 몇년전 정사 장면의 공개로 연예계에서 사라져야 했던 탈렌트 오현경이 떠올랐다.
비디오에 찍힌 두 사람의 정사장면이 갑자기 시중에 공개되는 바람에 심한 비난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도피하고만 이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한 현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도피와 자신의 일조차도 그런 식으로 끝내버려야 했다는 것은 이 사회의 여론 탓도 있겠지만,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던 것에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유명한 배우였으니깐 대중들은 당연히 그의 벗은 필름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자신의 비난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스스로의 믿음과 철학의 부재였다.
오현경은 여자의 속성상 분명히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서 비디오도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가 두 사람의 진정성을 배반하고 그걸 시중에 유통시켰다면, 그 비열함으로 인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그 남자여야 했다. 그녀는 오히려 배반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피해자로서 동정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비정한 사회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도피의 길을 나섬으로써 자신의 부적절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서로의 몸을 나누는 일이 어떻게 잘못된 일이 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이에서의 성이란, 사랑만이 윤리와 도덕의 잣대가 될 뿐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성을 탐닉하고 매매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굴곡되어 있는 인간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어릴 때부터 여성이길 거부당한 사람이 어떻게 이성을 만날 수 있겠으며,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여관방엘 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도 그 시절 독립적인 피아노학원에서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나 책에서 보면 가난한 시절의 유럽에서는 친구의 방이나 오피스텔을 빌려서 사용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들에게 성이란 감추어서 쉬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니깐 이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사중인 데도 찾아간 손님을 자연스럽게 맞아들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아!!!
결론이 난 것인가?
마지막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자꾸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는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더 확실히 하고 싶어서는 아닌지....... 다시 말문이 열리면, 연애와 결혼이라는 그 한끗의 차이에 대해서 한번 더 쓸 것을 약속드리면서 이 주제는 이것으로 끝을 내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