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잡다하고 반복적인 일상생활로의 진출이라고 생각했다.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서 구토를 느낀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져버렸다. 전에는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니 세상이 너무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그만한 나로서는 배울 것도 많았고 읽어야 할 책도 늘 밀려 있었다. 그러나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믿어온 사랑이나 진실이라는 것이 단지 현재상황의 이해득실의 논리에 밀리기만 하는 꼴을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뭘 배우고 싶지 않았다.

무진장 널려 있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그나마 내가 한 짓이라고는 한문을 종이에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일이었다.

자꾸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이 너무 죄송스럽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유일한 한 가지는 삶의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일이었다. 그냥 훌쩍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절실한 크리스찬으로 자라온 나는 그것만은 차마 용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지 살아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생각도 하기 싫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하루 24시간을 견뎌나가는 것이 매번 지평선 하나를 건너가는 일처럼 망망한 것이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세끼 밥해먹고 빨래하고 밤이면 찐~한 섹스를 나누고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하는 잡다한 일상적인 일들이 나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 같은 여자한테 결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나는 결혼을 해야 했다.

남자를 볼 때마다, 저 남자가 나를 데려가줄 것인가? 저 남자는??? 그렇게 살피느라고 내 눈이 가자미눈처럼 옆으로 찢겨져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냥은 속에 든 것까지 꺼내줄 만 하다가도 결혼 비슷한 이야기만 나오면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뒤에는 만날만한 남자가 있어도, 또 가자미눈처럼 찢어질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오히려 피하기조차 했다.

그때 구원의 한 사도가 나타났으니,

지금의 남편이다.

서울도 싫고 직장의 분위기도 싫어서 사표를 작성한 나는 그걸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이 사도는 35년간의 철저한 자기 수련을 끝내고 처음으로 이 사회에 나와 세계 장애인 기능올림픽 대회를 준비하느라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합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통하는 데가 많았다.

신선처럼 집에 칩거하면서 시와 그림을 연마하며 시간을 보냈던 터라, 나이답지 않게 눈빛이 맑고 얼굴도 수려했다.

그러나 그의 장애가 만만치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안동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혼자 있는 아파트니까 먹고 자는 건 해결해주겠다고 내려와서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늘 그랬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그때 내 심정으로는 돌파구가 그것밖에 보이지 않을 때였다.

하루에도 사표를 몇 번이나 꺼냈다가 넣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억지로 자신을 자제시키고 있을 그 무렵 합숙훈련이 끝난 이 사도는 세계대회가 열리는 콜롬비아로 출발을 했다.

다음날 나는 학생들의 서류를 뽑기 위해 컴퓨터실에 갔더니 그가 쓴 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컴퓨터 안에도 입력이 되어 있었다.

-컴퓨터 분야에 나가는 선수가 이 컴퓨터를 사용하여 연습을 하곤 했는데, 광고 그래픽 분야에 나가는 이 남자도 함께 올 때가 많았던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해준다면........’

대충 이렇게 나가는 시였는데, 시집을 못가서 눈이 벌겋게 되어 있던 내 눈에는 완전 구애의 선언문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만 해도 장애인끼리의 결혼이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자살행위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을 때여서 반대가 심각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미쳤다고 그러시면서 실상은 우리 엄마가 미칠 지경이 되었고,

자라나는 후배장애인들에게 결혼에 대한 패배적인 선례를 남길 우려가 있다고 직장에서는 쫓겨날 뻔도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남자이긴 하지만 상당히 부자일거라는 억측도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보증금 얼마에 달세까지 딸려 있는 셋방 하나를 달랑 얻어야 하는 형편이었고 그나마 돈이 없어서 전화 한 대도 놓지를 못했다.

나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할 때까지도, 그의 학력이 어디까지인지, 그의 집 형편이 어떠한지도 몰랐다.

진정코 시집가는 일에만 목숨을 건 것처럼 혼자서 강행군을 해나갔다. 이 일은 뒤에 우리 남편한테조차 의구심으로 남아 있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사실, 한 가지 걸렸던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장애였다.

보통 때는 휠체어를 타고 있던 이 사도가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일어난 모습을 우연히 뒤에서 바라봤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쓴 시 한 편을 읽자마자 이 망설임조차도 날라가버린 것이다.

나도 장애라는 것 때문에 수없이 상처를 입고 버림을 받아 왔는데(?) 나까지 그를 버릴 수는 없다는, 자제할 수 없는 공명심 같은 것이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왔다.

크윽~ 사실은 그때 내가 그를 버렸다면 그는 더 좋은 여자한테로 장가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더 좋은 여자라 함은 장애가 없는 여성을 말한다.

잡초처럼 아무렇게나 자란 나와는 달리, 이 남자는 거의 전지전능하게 돌봐주셨던 어머니 덕분에 왕자님처럼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나한테 장가를 와서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장애인치고는 상당히 날렵한 편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비장애 여성의 민첩함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곧, 나 역시 장애인 남편을 만나서 답답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결혼하고 나서 첫 번째의 부부싸움은 아주 사소한 데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고, 직장을 떠나고 싶어서 결혼에 더욱 안달을 부렸지만, 이제는 식솔이 딸린 현실이 되고 보니, 서울이고 직장이고 다시 마음을 붙여서 열심히 다녀야 했다.

그리고 신혼 중 처음으로 맞이한 일요일이었다.

나는 전날 봐두었던 시장 재료로 몇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밥통에는 식은밥이 밀려 있었다. 내가 출근을 하면 남편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웠던지 자꾸 식은 밥이 뒤쳐진 것이다.

나는 당연하게 이 식은밥을 푹푹 삶았다. 대학 때부터 시작된 자취 생활 10여년 동안 내 몸에 붙어 있던 습관이었다. 먹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그걸 남겨두면 누가 처치할 것인가. 또 나는 식은밥이나 삶은 밥이 싫다는 생각을 평소에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몇가지나 되는 반찬에 스스로 도취되어 멋있게 밥상을 차렸는데 이 새신랑이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이 식은밥을 어쩌란 말인가? 그 당시는 전자레인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또 있었다고 해도 그걸 장만할 처지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서로 마음 하나만 부둥켜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따위 밥 하나를 가지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에 새 각시한테 화를 내다니 나는 서럽다 못해 겁까지 더럭 났다.

혹시 이 사람은 선량한 남자의 탈을 쓴 괴물이 아닐까?

“이렇게 좋은 반찬을 만들어놓고서도 밥상을 망쳐놓고 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화가 났던 거지”

남편은 이렇게 그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그 당시 낯설었던 느낌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일상생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알콩달콩하고, 때로는 지지리도 지겨운 일상적인 생활 말이다.

뒤에 보니까 우리 시어머니는, 아무리 밥통에 따끈한 밥이 있더라도, 또 아들이 자정이 넘어서 어쩌다가 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바로 부엌으로 뛰어나가서 새 밥을 짓는 분이셨다. 손끝이 맵짜고 몸도 잽싸셔서 아무리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우리 어머니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우리 남편이 걸을 때면 앞꿈치를 끌면서 걷기 때문에 신을 한번만 신어도 앞부리가 흙탕이 되었다. 그런데다 꼭 하얀 운동화만 신어야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번도 이 남자가 흙 묻은 신발을 신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엘 갔더니 하얀 운동화가 깃발처럼 빨래줄에 한가득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일곱, 여덟 켤레의 운동화가 한꺼번에 널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는 아들이 외출을 할 때면, 새 운동화 한 켤레와 작은 의자, 그리고 신문지를 들고 따라 나가셔서 흙길이 끝나는 곳에 의자를 놓고 앉혀서 신문지를 깔고 새 운동화를 갈아 신겨 이 세상 속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헌신적인 돌봄을 받아왔던 우리 남편으로서는 아침식사에, 그것도 신혼의 첫 일요일 아침에 식은 밥을 먹는다는 것이란 용납할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로의 진입을 간절히 원하던 나는 이렇게 코가 꿰었다.

그리고 과연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당면한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족은 있어도 존재 자체를 뒤집는 회의 같은 건 생길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지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숙제가 언제나 내 앞에 있었고, 그건 몸을 부리고 신경을 쏟아주어야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네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운 세상에 남편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살려느냐? 네가 그렇게 알멩이 하나 없는 겉똑똑이인줄 몰랐다고 가슴을 치던 우리 엄마의 푸념처럼, 나는 왜 이런 남편을 만나서(그는 왜 이런 색시를 만나서) 힘든 인생의 짐을 두 배로 지고가야 하는지 스스로 가슴을 칠 때도 많았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아무리 가슴을 치고 또 치고, 빵꾸가 날만치 내려쳐도 그 답답함이 풀리지를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답답하게 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도 이제 이력이 나서 웬만해서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내공이 쌓였다.

지금의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자유롭고 행복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결코 놓지 않는 우리 남편의 오만함을 높이 평가하고 그리고 깊이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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