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 년 된 일인 것 같다.

음악공연 기획회사의 출판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은 늘 시간에 쫓긴다. 공연일이라는 정해진 날짜가 있는데 일이 매번 급하게 돌아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라도 쫓기지 않을 때라야 5시에 퇴근을 한다.

그 날은 손님이 와 있어서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먼저 전화로 확인을 했다.

“응, 지금 나갈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이른 저녁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른 저녁이 아니라 늦은 저녁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질 않았다. 혹시 급하게 일이 생겼나 싶어서 회사에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으면 뽀르륵 전화를 해보면 되지만 그때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디 데모가 터져서 길에 갇혔나, 걱정을 하면서도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후식으로 술과 안주까지 준비되어 있었지만 주인 없는 술자리는 그냥 횅덩그레 비어 있었다.

“다른 볼 일 보시나보지 뭐.”

자꾸 시계를 보면서 조바심을 내고 있는 나한테 손님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도 역시 내심으론 걱정인 것 같았다. 출퇴근만으로도 힘들어서 늘 숨차 하던 그는 그때까지 한번도 퇴근 시간 이후에 다른 볼일을 본적이 없었다. 땡, 이면 땡, 하고 돌아와서 다음 날의 전투를 위해 비상사태에 들어가는 결사대 같은 생활을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벌써 마지막 뉴스를 끝내고 번쩍거리는 전파만 흘러나왔다. 손님은 기다리다 돌아가고, 나도 아이 곁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두시였다.

아이쿠!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고 길거리를 뛰어나갈 수도 없고 하릴없이 회사 사무실에 전화를 또 걸어보니 빈 벨소리만 돌아온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다 떠오르는 가슴을 두 손으로 진정을 시키면서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자고 결심을 했지만 30분이 지나고나자 내 가슴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먼저 119에 전화를 해서 사람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할 시간이 남아 있다고 자신을 아무리 타일러도 내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실려 버렸다.

“기다려보세요, 남자분들은 이런 일이 흔하답니다.”

비상전화를 받는 남자분은 타이르듯이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그런 남자가 아니예요. 술을 먹거나 친구를 만나서 집에 올 시간을 잊어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예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단 말이예요.”

나는 거의 결사적이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웃으면서 실종신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신고만 해놓고 기다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남편의 출근길을 더듬으면서 관할 경찰서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종로서부터 대학로, 미아리, 구역마다 전화를 해서 차량 번호를 대면서 확인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쌍문동 파출소에 전화를 했더니 우리 남편과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병원에 이송되었다고 했다. 길거리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그 병원으로 전화를 했더니 그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숨을 거두어서 영안실로 옮겼다는 것이다.

아이고, 하나님!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일을 어째, 이 일을 어째, 정신을 잃고 있는 중에 병원 사람이 영안실로 바꾸어주었다. 그랬더니 새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나보고 누구냐고 그랬다. 부인이라고 그랬더니, 그 분의 부인은 여기에 있는데요, 그러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정신을 차려서 확인을 해보니 의정부 사람이 아니라 쌍문동에 사는 동명이인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급한 불상사는 피해갔지만 내 머릿속의 불길함은 사라지지를 않았다. 남편은 지치고 지쳐서 이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말을 입에 늘 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겠다고 남편이 취직을 하자마자 6개월만에 직장을 관두고 들어앉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인들 어이 알랴 싶었지만 혹시 직원들끼리 무슨 어울림이라도 있었을까 싶어서 새벽 4시가 되자마자 전화를 드렸더니 그 분 역시 깜짝 놀라셨다.

나는 그 와중에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주민등록증과 의료보험증, 지갑을 챙기고 울면서 남편의 새 속옷까지 챙겼다.

그리고 날이 부윰하게 밝아오는 것을 기다려 콜택시를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남편의 회사 주차장에서부터 집에까지 돌아오는 길을 샅샅이 뒤져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콜택시를 기다리느라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때 남편의 차가 졸졸졸 아파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반가움은 둘째 치고, 밤새 난리를 친 걸 생각하니 사장님께도 미안하고 남편한테도 미안했다. 그러나 그만큼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건너는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얼마나 아파하고 얼마나 불안해했던지 나는 늘 죽음의 벼랑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하다고 하는 그는, 너무 괴로워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했더니 취해서 돌아올 수가 없었다고 그랬다. 내가 전혀 모르는 그의 면모였지만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별 추궁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한 그가 식탁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피곤함으로 얼굴은 파리했지만 눈빛만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고객 중에 미술을 전공한 아가씨가 있는데 얼마 후에 파리로 유학을 간다면서 떠나기 전에 같이 하룻밤이라도 지내고 싶다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고.

그런데 그 아가씨가 척추결핵으로 깊이 함몰되어 있는 이 남자의 등에 자기 손바닥을 갖다대면서,

“이랬군요. 이래서 그랬군요.”

나직히 읊조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타인의 상처에 자신의 손을 갖다댈 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 상처가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닌 우리 남편의 상처였는데, 그것도 고결한 아가씨의 몸으로 그럴 수 있었다면,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 다음날 나가서 남편의 패션 팬티 몇 장을 샀다.

그게 한번이라도 더 사용될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이후 그런 외박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사건은 남편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아님 실제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우리 남편을 더 위로해주고 더 기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느껴야 했던 그 깊은 슬픔과 좌절감 그리고 그 안타까운 결핍을 어떻게 나 혼자 다 채워줄 수 있겠는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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