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는 라일락꽃 향기가 사람들의 낮은 숨소리에도 분처럼 막 묻어날 것처럼 짙게 풍겨왔다. 햇살 가득한 창밖의 나무들이 너무 싱그러워 퇴근할 준비도 안하고 앉아 있는데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친구들 여섯에게 신부 대현이가 번개를 쳤다.

두 달에 한번 정기모임이 있는데도 일년이 넘도록 여섯 친구가 한자리에 모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었지만 오늘만은 갑자기 받은 번개에 다들 놀랐는지 여섯이 다 모이게 되었다.

고2짜리 딸을 일류대학에 보낼 꿈에 부풀어 있는 지숙이, 무역업을 하는 철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을 하는 준영이, 소아과의사인 혜경이, 조용필의 노래를 잘 부르는 성직자 같지 않은 신부 대현이, 그리고 나, 우리 여섯 친구가 오랜만에 모였으니 할 말도 많고 생각나는 추억도 많다.

공부 잘하는 딸 자랑, 외국을 자주 드나들어 바람이라도 피울까 부인이 바가지를 긁어서 죽겠다는 넋두리, 유독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어린 환자를 보면 그 날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 노처녀의 노자는 잘 해석해 봐야 한다는 너스레로 나의 얼굴을 붉게 한 짓궂은 농담 , 일상에서 일어났던 자잘한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자리를 잡을 나이가 된 친구들은 주름이 늘어가는 수만큼이나 삶의 여유가 몸에 베어 있는 듯하였다.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도 여섯 친구의 얼굴에 하얗게 내려앉아 우정을 비추고 있었다.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편안한 게 친구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들었다.

한줄기 바람이 싸하니 불어가니 누군가가 "대현아 바람이 뭐락 했나 좀 불러 봐라"라고 아주 작게 말했다. 바람이 또 한번 불고 가니 대현의 노래가 버릇처럼 들려주던 그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 중략 -

바람이 불어오면 귀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중략 -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하나 심어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잿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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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어둠을 보랏빛 라일락꽃과 함께 수놓으며 노래는 허공으로 황홀하게 퍼져나갔다.

친구들과 아무런 부담 없이 떠든 수다에 대현의 노래까지 들을 수 있던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오후는 노래가사의 한 소절처럼 인생의 따듯한 우정이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봄밤의 추억을 만들고 헤어졌다.

친구들을 다 보내놓고 나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는 차안에서 대현은

2년 전부터 칠십이 넘은 부모님께서 연고가 없는 어르신 세분을 모시고 있는데, 부모님께서 당신들의 사후에라도 성직자의 길을 가는 아들이 소외된 노인들을 모시고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유언처럼 하신 말씀을 이제는 실천해야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복지란 말은 잘 모르지만 내 부모같이 어르신들 모시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대현의 얼굴이 참 환해 보였다.

좀더 허락이 된다면 장애를 가진 어르신들을 모실 계획이라 하였다.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날처럼 대현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처럼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차에서 내리는 내게 잘 가라는 인사 대신에 지금하는 일과 미래를 생각해서 전문적인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봄밤의 꿈같이 부르던 노래 속에 따뜻한 인생을 담은 친구 대현, 만인을 어루만지며 성직자의 길을 아름답게 가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 또한 더 나이들어서 친구의 지지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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