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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기’와 ‘퍼먹기’의 차이

호두의 참맛을 보려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1-12 21:40
호두 에이블포토로 보기 호두
어릴 적 세뱃돈과 함께 맛있는 음식들로 꿈같은 설날을 보내고 나면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그 아쉬움은 2주만 지나면 다시 정월 대보름을 맞는다는 기대감으로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정월 대보름을 기다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고소하고 맛있는 잣과 호두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습니다.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두꺼운 파란색 전화번호부 책 위에 호두를 올려놓고, 펜치(실은 플라이어)로 잘 잡은 뒤, 망치로 내려쳐서 깨진 호두조각들을 골라 먹는 재미가 나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어려운 ‘까먹기’의 과정을 거친 후 먹게 되는 호두의 고소한 맛은, 비싸기 때문에 몇 개 밖에 배당받지 못한 희소성으로 더욱 나를 행복하게 했고, 이빨로 어렵게 힘조절하며 깨먹어야 하는 잣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맛은 추억 속에서나 기억 될 뿐,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월 대보름에 호두를 까먹은 적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깐호두가 많이 담겨있는 건과류선물세트를 받아서, 그 전의 호두 맛을 떠올리며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망치로 내려치고, 가끔은 쭉쟁이(알맹이가 없는 것)나 뭉개진 호두 부스러기에 속상해할 것도 없이, 수저만 갖고 그저 ‘퍼먹기’만 해도 되는 상황은, 어렸을 때는 상상으로만 만족해야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엄청 맛있어야할 ‘퍼먹는’ 호두의 맛은 ‘까먹는’ 호두의 맛만 못했습니다. 잣이나 호박씨의 깐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참맛’이라고 하는 것은, 호두, 잣, 호박씨 등의 물질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작가가 토함산의 석굴암에 올랐던 이야기를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산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올라간 토함산 정상의 세계문화재 석굴암 속에 있는 불상은 아주 웅장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는 이를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본 것은 깨달음의 부처가 아닌 단지 불상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진지하지 않고 무지해서가 아니라 너무 쉽게 부처님 앞에 섰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신라인들처럼 새벽 산을 한걸음씩 인생을 반추하며 오른 자만이 깨달음의 부처를 볼 수 있으며, 차를 타고 산을 오르는 현대인들은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후, 저는 깨달음의 부처 또한 토함산 꼭대기의 석굴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디펜던트 리빙의 진정한 가치는 잘 갖추어진 서비스 체계나 정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그러한 것들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며,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내는 장애인 자신으로부터 인디펜던트 리빙의 진정한 가치가 우러나올 수 있습니다.

최근 중증장애인 당사자의 요구도 없이,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인디펜던트 리빙 관련 정책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일종의 복지 서비스로 취급하려는 공무원들의 자세에 씁쓸함을 느낍니다.

이제 막 시작된 2003년,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인디펜던트 리빙과 관련하여 전국적인 인적 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또한 그 과정상의 난제들도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움직임을 가로막는 많은 어려움들은 결국 언젠가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될 인디펜던트 리빙의 결과물들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올 한해, 이 땅의 중증장애인들이 인디펜던트 리빙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이 글은 ‘이광원의 소비자로서의 장애인(column.daum.net/sojang)’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광원 (letitbe19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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