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등에 업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 무렵 목발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혼자서는 몇 발자국밖에 걸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화장실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래서 수업을 마칠 때까지 용변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가끔 낮술을 할 때도 있었다. 낮술이 과한 날에는 손녀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곤 하셨다. 난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서 하염없이 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난 이미 여덟살의 나이에 기다림을 배우고 말았다.

그날도 역시 빈 교실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만 오줌을 싸고 말았다. 그리고 교무실에 가셨다가 반장과 함께 교실에 들른 담임선생님께 들켜 버렸다. 뒤늦게 도착한 할아버지는 선생님과 내게 연신 미안하다며 나를 들쳐업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할아버지는 내 젖은 엉덩이쯤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교문을 빠져나올 무렵 반장과 마주쳤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할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이 오줌싸개!"

그동안 놀림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대부분 꾀죄죄하고 껄렁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왔기에 그다지 개의치 않을 수 있었는데, 너무도 반듯해보이는 반장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난 꽤 충격을 받았다.

"예끼, 이놈!

할아버지는 자기 잘못 때문에 내가 놀림감이 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그를 나무랐고, 반장은 냅다 도망을 쳤다.

"저런, 못된 놈!"

할아버지는 아무리 그를 욕해도 내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난 나 자신이 철저히 남들과 다른 조건임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체육시간이나 소풍날에 혼자남아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순간에는 더욱 더 내가 남들과는 다름을 확인하곤 했다. 훗날 어른이 되어 나를 채용해줄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이 올 것을 기다리던 순간까지 내 기다림은 언제나 길고도 길었다.

엄마는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참을성이 많다고 자랑하곤 했다. 확실히 난 나이보다 속이 깊고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나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 내가 특별히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고는 장애인은 인내심이 강하다느니, 집중력이 뛰어나다느니 하며 장애라는 변수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싸잡아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몹시 불쾌하다. 앞으로도 나를 둘러싼 환경은 절대 변하지 않을 터이니 지금처럼 잘 참아왔듯이 계속 참아달라는 강요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강요된 기다림과 인내는 우회적인 폭력일 뿐 결코 미덕이 아니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