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을 찾으려고 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일까? 수영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다. 과연 수영장 주인은 나를 어떻게 볼까? 아직도 남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는 나 아니 여전히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도 배려해야 하는 나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계단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이용하던 수영장은 지하 2층에 있었다. 게다가 남자 샤워실은 수영장 옆을 한 참 걸어가야만 했다. 잘 알다시피 수영장은 물로 넘치는 곳이다. 얼마나 미끄러운가? 뿐만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수영장 한 부분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살아온 그 자세를 당당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사실 장애인 전용 수영장이니 하는 것은 이러한 후안무치의 자세를 아직 견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수영장 입구에서 수영장 안에까지 도달하기에는 심리적인 문제 보다는 물리적인 문제가 더 심각했다. 동네 수영장이 폐쇄된 이후 또 다른 수영장을 찾고 있지만, 그러한 수영장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물리적 환경의 문제이지 결코 심리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고객의 다수인 여성을 중심으로 수영장 구조는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여성은 여기에서 또 배제되어 있다. 그러니 장애를 가진 남성은 완전히 열외된 왕따 구역에 속해있다.

장애인들 특히 하지를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또다른 적이 있다. 그것은 비만의 위험이다. 달리 땀을 흘리면서 운동할 수 있는 가지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이 관절에 무리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수영이다. 그런데 수영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비만을 해소할 수 있는 운동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운동하는 본인이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단계를 넘어서 고통스러운 노동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이다.

수영장에 배석한 수영강사는 참으로 수영을 잘한다. 하긴 잘하니까 강사이겠지만. 그는 물찬 제비 처럼 물 위를 가르면서 수영을 한다. 그런데 하나 그의 몸은 결코 몸짱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나온 배(그가 신혼인데도 불구하고)와 숏다리는 그가 수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아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물속에만 들어오면 그는 물찬 제비이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자네를 보면 수영 할 맛이 안나네" "왜요?" "아니 자네는 하루 종일 물 속에서 살면서 왜 이리 뱃살이 안빠지나?" 그는 대답한다. "이는 뱃살이 아니라 복근(腹筋)이예요" 농담도 잘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오늘도 배에 가득한 지방이 살이 되고, 후에 근육을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하여튼 하반신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수영이 가장 효과적인 운동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수영장을 찾고 있는 나, 쉽사리 수영장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장애인에게 접근성이 확보된 수영장(반드시 장애인 전용 수영장이 아니라도 좋다. 장애인에게 접근성이 편리하면 모든 이들에게도 편리할테니까)이 지역단위에 하나씩을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장애인, 임산부, 노약자를 위한 편의증진법에도 수영장등 장애인이 접근하여야 하는 모든 시설에 편의시설이 확보될 수 있는 강제조항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장애인에게 더 필요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든 이러한 시설은 공사를 넘어서서 개선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시설의 개선을 위해서도 우리 장애인들은 수영장을 자주 찾아야 한다.

어느 날 하루, 나는 수영을 다하고 샤워를 한 뒤 탈의실을 찾았다. 옷장에서 옷을 여는 사이 나는 순간적으로 탈의실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군가가 흘린 물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나는 지팡이가 물에 미끄러져 스러지면서 거구의 몸을 가진 나 역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때 나는 소리낼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경험했다. 어깨를 다친 것이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다친 어깨, 계속되는 통증, 나는 당분간 수영을 쉬어야 했다. 그러나 고통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 쪽 어깨에 의지하여 다녀야 했던 나는 어린이집 화장실 바닥에 깔린 또 다른 물에 미끄러져 나머지 한 쪽 어깨마저 다쳐야 했다. 양쪽 어깨를 다친 나는 좀 더 길게 쉬어야 했다.

어제 밤, 눈이 억세게 내리던 서울 거리에서 많은 사람이 손을 주머니에 넣고 움추린 상태에서 걷다가 미끄러워 넘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넘어진 것이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이러한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수영을 시작하련다. 이러한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 언제 올 것인가?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수영장을 찾으련다. 그리고 수영장에 가득찬 장애인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도 우리 장애인들에게 요청한다. "수영을 하세요!"

아직도 나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지방 어느 곳이든 수영장을 찾는다. 내가 수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수영장을 배회할 때, 사람들은 의아함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지팡이가 사라진 물 속에서 물을 가르고 수영을 할 때에는 그들의 의아함은 자연스러움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의아함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두 다리 멀쩡한 저들은 왜 수영을 못할까? 나보다 몸도 가벼운 저들은 왜 뜨지 못할까?(사실 물 속에서는 다리가 필요없다)"

물 위를 가르고 세차게 나아가는 나를 신비함으로 바라보는 저들을 의아함으로 바라볼 즈음이면 입장은 역전된 것이다. 이제 나는 당당하고 의연하게 수영장을 찾는다. 수영을 마치고 났을 때의 개운함 그 이상의 성취감이 마비된 두 다리에도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한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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