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자립생활 이론가인 줄 알았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도 아니면서 장애계 현장을 호흡하는 사람이구나, 그 이력이 궁금했었더랬죠. 이 분의 강의를 꼭 한번 듣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있었어요.

만나본 그는 작은 키에 만년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혀가 말려들어가는 어눌한 발음에 칠판에 판서를 하려 움직일 때마다 비틀대는 발걸음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죠. 그걸 허무는 소탈한 웃음에 강의시간 네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연구소'에서 '노적성해장애인자립생활자원센터'로 활동무대를 옮긴 전정식 소장.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 분을 펜으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나고 싶어서 이메일로 만나봅니다. 인터뷰도 고역인데 사진 올리는 건 사양하고 싶다는 본인의 의견을 존중해 사진은 생략합니다.

-자립생활이나 장애인정책 세미나에 빠지지 않는 발표자 중 한 분이신데요. 제일 중점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저는 원래 어떻게 하면 재밌게 오늘을 보낼까를 가장 많이 연구해요. 그래서 사실 정책과 관련해서 중점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없어요. 그때 그때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주제를 연구하는 편이지요. 요즘 들어 가장 관심 있는 분야를 들라고 하면 ‘근로지원인 제도’에요.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노동인데 이를 위해서 꼬옥 필요한 제도라고 보거든요.

-전국 각지의 자립생활센터를 발로 찾아가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연구소’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소장님이 흥미 있게 지켜본 자립생활센터 세 곳과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저 남쪽 나라 광주의 우리이웃센터, 전주의 덕진센터 그리고 서울의 양천센터가 좋아요. 저는 말만 하고 실천을 잘 못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이 세 곳은 말과 실천이 함께 가요. 자립생활에서 말하는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삶’, 그건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소통하며 사는 것이라고 봐요. 이 세 센터는 이걸 실천하고 있어요.

우리이웃센터에서 자원봉사자 모임을 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덕진센터에서는 인근 아파트 주민이 장애인야간학교 교사를 하고, 장애인 주민과 아파트 주민이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가족간에 교류를 가져요. 양천센터에서는 장애인들과 주민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와 구청 간에 서로 친밀한 교류를 가져요. 이제 3년째로 접어든 장애인 인식개선 한마당 행사가 이젠 양천구 전체의 잔치로 발전했고요.

광주의 우리이웃센터 자원봉사자 모임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사진은 장애인들의 권익옹호 활동 모습 ⓒ우리이웃센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소장님께도 중복장애가 있다고 들었어요.

▶음, 이건 비밀인데. 일단 정신장애가 다소 있어요. 화 한번 나면 정신없어요. 가장 오래된 장애는 시각장애에요. 1966년 산인데, 태어날 때 분만시 사용하는 기계가 제 오른쪽 눈을 찔러서 시각 기능을 가져갔어요. 상대적으로 최근에 갖게 된 장애는 척수장애에요. 1998년 목 디스크 수술 의료사고로 경추에 손상을 입었어요. 척수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서 불완전 척수마비에요.

-장애계 현장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알고 싶어요.

▶원래 장애 정체성도 별로 없었고 장애운동에 관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박사과정에 진입한 지 한 학기만에 의료사고로 경추손상 장애인이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장애인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치는 사이 한국에 자립생활 이념이 들어왔어요. 박사논문 주제를 장애인 자립생활로 잡고서 현장 참여관찰하겠다고 2003년 겨울 서울의 한 자립생활센터를 찾아갔는데 그 이후로 그만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이라는 급류에 휩쓸리게 되었지요.

전주의 덕진센터는 인근 주민들과 가족간 교류를 맺고 있다. ⓒ덕진센터

-장애를 긍정하기까지 역할모델이 된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 있을까요?

▶제가 워낙 긍정적인 인간이에요. 그래서 사실 딱 집어 언급할 역할모델이 없어요. 허리 아래로 아무 감각이 없음이 확인되고 수술한 의사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안쓰럽게 쳐다보던 며칠 동안 아주 잠시 비탄에 잠겼다가 이내 현실을 긍정해 버렸으니까요. 굳이 역할모델을 찾자면 자립생활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의 역할모델이에요. 장애를 가지고 즐겁게 살아가는 나름의 비법들을 끊임없이 전수해주거든요. 모두가 제 스승이고 제 삶에 의미와 기쁨을 더해주는 분들이에요. 그리고 힘이에요.

-현재 서강대 대학원에서 장애인복지론을 강의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원래 전공은 사회학이었던가요?

▶예. 학부는 독문학, 부전공은 철학, 대학원 전공은 사회학이에요. 전부 돈 안 되는 학문들이지요. 그래도 저는 이 학문들을 사랑해요. 무엇보다 사람을 정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주체로 보는 학문들이에요. 사회학은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어떤 결론을 갖고 대상을 바라보지 않아서 좋아요. 예컨대 장애인 집단이 있다면, 이들의 문제점은 뭘까 뭘 뜯어고쳐야할까 뭘 해줘야할까 하는 식으로 접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 희노애락은 무엇일까, 중요한 관심사나 희망사항은 뭘까 하는 식으로 접근해요. 연구자는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당사자들의 삶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정리해보는 거지요. 지금의 이메일 인터뷰처럼요.

서울의 양천센터는 한마당잔치를 양천구의 잔치로 발전시켰다. ⓒ양천센터

-올해 ‘노적성해장애인자립생활자원센터’를 설립하셨는데요. 자립생활 연구에서 자립생활 실전에 뛰어들면서 체득하게 된 것들은 어떤 것일까요?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체득한 게 별로 없어요. 단지 한 가지 있다면 어렵다는 거에요. 복지관같이 관 주도로 이루어지는 기관과 달리 자립생활센터는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NGO조직이기에 행정 실무와 재정 모든 것이 쉽지 않아요.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유지하고 지역에서 뿌리 내린 분들 정말 존경해요. 체득한 것이 있다면 이 존경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분들이 많이 노적성해를 도와줘요. 감사하죠. 현장에서 자립생활운동의 대의를 실천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아요. 그리고 단 시간 내에 이루어지지도 않고요. 1년 정도 지나니 팍팍 느껴져요.

-외국 사례들도 많이 연구하셨을텐데요.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하지만 놓치고 있는 정책 좀 소개해 주세요.

▶솔직히 외국 사례 잘 몰라요. 직접 가본 곳은 일본과 캐나다뿐이에요. 그것도 보름 정도 머물다 온 거라서 뭘 제대로 알 수 있겠어요. 작은 인상 정도만 가지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캐나다 주거지원 정책이 좋아요. 캐나다에서는 장애인들이 시설 공동생활부터 자기 집 소유까지 다양한 스팩트럼의 주거정책에서 골라 이용할 수 있어요.

제가 가장 탐나는 주택정책은 주거개조 지원이에요. 장애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개조라고 판단되면 정부가 비용 다 대서 해줘요. 장애인이 신청해도 해주고 장애인이 세들어 사는 집주인이 신청해도 해줘요. 뱅쿠버 아래 리치몬드라는 도시에 사는 나이 지긋한 척수장애인의 집에 갔어요. 일반 주택지역의 단독주택 2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데, 현관문을 열면 바로 왼편 벽 쪽에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그걸 이용해 위 아래 이동할 수 있었어요. 그 엘리베이터를 전에 살던 집 주인이 신청해서 정부가 해줬대요. 한국에는 아직 이러한 정책이 없어요. 운동해서 이런 정책 꼭 만들고 싶어요.

-자립생활 혹은 자립생활센터가 우리 사회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소통하며 살자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려면 활동보조서비스, 주거 및 편의환경, 노동이 필요해요. 활동보조서비스는 현재 부족한대로 제도화는 되었으니 서비스 총량을 늘리는 노력을 기울이면 되겠고, 정작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 편의환경, 주거, 노동이에요.

시설을 가지 않고 지역에서 뿌리내리려면 접근성을 갖춘 주거가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편의환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구에게나 편리한 유니버설디자인 환경이 필요해요. 그리고 장애인이 노동하고 소득을 가져야 해요. 당당한 소비자가 되어야 지역사회에서도 인정해요. 자립생활센터는 이 문제들에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이것들이 자립생활운동에서 말하는 권익옹호의 핵심들이고요. 이 문제들을 장애인 당사자들이 해결해 나가다보면 역량강화는 덩달아 따라오리라고 봐요. 그리고 그러다보면 자립생활운동과 자립생활센터가 지역에서 자연스레 뿌리를 내릴 거고요.

* 노적성해(露積成海) :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뜻. 노적성해장애인자립생활자원센터는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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