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 로버츠의 집에 초대된 세이케 카츠오(오른쪽). 에드의 활발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이케

더스킨재단의 지원으로 미국 버클리로 자립생활 유학을 떠났던 세이케 카츠오 씨는 현재 후쿠오카에서 ‘중증 사지마비인의 취업 문제 연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1986년 미국 방문시 에드 로버츠의 집을 두 번이나 방문했는데요. 에드 로버츠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글은 세이케 카츠오 씨가 1987년 10월, ‘척손뉴스’(일본 전국척수장애인연합회 발간) 에 기고한 ‘미국의 일년’을 정리한 것입니다.

자라난 내력

에드는 1939년에 태어났다. 내가 만난 당시는 47세였다. “14세 때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왼손가락과 왼발가락만 약간 움직일 정도로 심했다. 1962년, 집을 나와 생활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생활을 가져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식과 태도

“14세에 소아마비가 와서 슬펐다. 그전까지는 갖가지 스포츠를 즐겼다. 매우 침체되어 기적을 바랬다. 단식 투쟁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나는 소아마비 장애인이 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내가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나를 '덜 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의사들은 편견, 무시, 우려감을 안고 우리를 대한다. 대등하지 않은 인간으로 우리를 취급한다. 전문 상담가는 우리들에게 '저것도 할 수 없고, 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같은 입장의 장애인들만이 동료상담을 통해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가르칠 수 있다. 일본에서 장애인의 성의 문제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는데 장애인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며 반 사람 몫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에드의 말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이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을 좋아하게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장애를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장애와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에드는 격리와 통합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

“결혼해 이혼했다. 아내는 작업치료사였다. 병원에서 자립생활센터로 데려왔다. 왜냐하면 나는 병원이 싫기 때문이다. 아이도 낳았다. 내 피붙이다. 아들이다. 나는 감각은 전부 있고, 방광 조절도 배변 조절도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아이도 만들 수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자신감이 생긴다. 아내는 시골을 좋아하지만, 나는 거리를 좋아한다. 그 외에도 이유가 있지만 이혼했다. 그러나 현재는 만족스럽다. 여자친구도 많이 있다. 여성에게 상냥하게 대해라. 지금은 어머니와 사촌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은 나와 아내, 양쪽을 번갈아 가며 반반씩 살고 있다. 지금은 아내에게 가있다. 6월부터 3개월간 함께 산다.”

활동보조인

에드는 14세에 발병하고 난 후 살아있는 동안 내내 쭉 활동보조가 필요하다. 현재, 유료 활동보조인을 쓰고 있다.

그는, "활동보조인에게 시간당 6달러를 지불한다. 비서 업무에는 시간당 7달러를 내니까 한달에 총 2,400달러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활동보조 비용은 본인의 수입이 많기 때문에 자부담이다. 따라서, 에드의 활동보조 양은, 한달 340~400시간, 하루 11~13시간 정도일 것이다."(계속)

[축하한마디]장애인 등의 특수교육법 국회통과 축하 리플달기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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