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버클리자립생활센터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왼쪽부터 산소호흡기를 한 에드, 소장 마이클, 빨간 옷이 세이케 ⓒ세이케

80년대라고 하면 왠지 까마득한 옛날 같죠. 특히 우리나라 장애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 때 벌써 일본에서는 미국으로 자립생활 실무자들을 파견했는데요. 공무원이나 대학교수가 아니라 장애인들을 주 대상으로 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척수장애인 세이케 카츠오 씨도 더스킨재단의 혜택을 보았습니다. 미국 연수 5기생 열 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자립생활 유학을 떠났던 것이죠. 버클리하면 자립생활의 전설, 에드 로버츠가 사는 곳. 85년부터 1년간 그 곳에 머물며 에드 로버츠의 집을 방문하는 행운도 얻었다고 해요. 괜스레 감격스러워지는데요. 어디 에드 로버츠를 자립생활 이론서에서가 아니라 더운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나볼까요.

*이 글은 세이케 카츠오 씨가 1987년 10월, ‘척손뉴스’(일본 전국척수장애인연합회 발간) 에 기고한 ‘미국에서의 일년’을 정리한 것입니다.

에드 로버츠는, 미국의 장애인 운동의 리더로서 일본에서도 유명한 이름이다. 에드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 졸업한 후, 버클리에 최초의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해, 초대 소장이 되었다. 그 후, 캘리포니아주의 재활국 국장이 되었다. 현재(1986년)는, 민간 연구센터인 세계 장애인문제 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에드의 장애는 소아마비로 척수 손상은 아니지만, 전신마비 장애라고 하는 나와 공통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자립생활센터의 초대 소장이어서, 그의 생활과 의식을 아는 것은 미국의 중증 신체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을 파악하는 최적의 소재일 것이다.

최초로 에드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것은 1985년 12월 9일, 버클리자립생활센터의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호흡 보조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증 의 전신마비 장애인임에도, 쾌활하고 카리스마 넘치고 언변도 좋아 자신감이 흘러넘쳤고 믿음직하고 터프한 장애인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에드는 이미 일본에서도 유명했고, 나도 에드가 쓴 것이나 에드에 대해서 쓰여져 있던 것을 읽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의 인상은 선명하고 강렬했다.

에드와는 자주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드가 쓴 책이나 글을 받아 읽기도 했다. 또, 에드가 대표인 세계 장애문제 연구소에 가서 그 곳에서 출판한 책을 연구하고, 그 곳 직원들과 만나는 것은 나의 유학 연수 활동의 하나였다.

에드의 집에도 2번 방문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초로 에드의 집에 간 것은 1986년 4월 27일, 맑은 날이었다. 록크리지는 주변 환경이 좋아서 에드의 집도 매우 느낌이 좋았다. 에드의 활동보조인 알렌도 느낌이 좋았다. 집의 출입구에는 경사로가 있었다. 에드의 방은 1층 현관 옆에 있었다.

에드는 어머니과 같이 살고 있었다. 사촌형제도 함께 살고 있었다. 에드는 철제 인공호흡기에 들어가 있었다. “밤에 잘 때도 들어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 밖에 스피커 폰이나 리모콘이 부착된 텔레비전을 사용하고 있었다. 에드가 사용하고 있는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 시스템에 대해서, "얼마입니까"라고 물었더니 "1만 달러다"라고 대답해주었다.

에드가 커피와 홍차를 대접해 주었다. 나는 가져온 에드가 쓴 논문을 보며 "이것은 전부 당신이 쓴 것입니다. 당신은 일본에서는 슈퍼맨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에드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 에드의 집을 방문한 것은 1986년 8월 16일이었다. 에드의 아들과도 만났다. 두 번의 만남으로 에드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계속)

[축하한마디]장애인 등의 특수교육법 국회통과 축하 리플달기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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