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공주라면, 왕자라면.

"상상력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답기만한 공주와 잘 생기고 용맹하기만한 왕자는 고난과 위험, 사악한 마녀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드디어는 결혼하고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자알 살았답니다.' 이런 동화 속 왕자와 공주 이야기가 고리타분하고 엉터리처럼 느껴지신다면, 환상적인 실루엣 에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 강추합니다.

밤마다 도시의 시네마에서 펼쳐지는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아라비안 나이트같은 매혹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하는 왕자.

마법에 걸려서 꼼짝도 못 하게 된 공주를 구하기 위하여 수많은 왕자들이 모험을 떠났지만 모두 실패하고 개미로 변해버립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지만 겸손하고 동정심 많은 왕자는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공주를 구해냅니다. 허풍쟁이 마초는 가라! 소심왕자 만세!

거만한 이집트 여왕과 가난한 무화과 청년.

가진 것이라고는 무화과 나무 한 그루 밖에 없는 가난한 청년은 아름다운 여왕의 꿈을 꿉니다.

한 겨울에 거짓말처럼 잘 익은 신선한 무화과를 여왕에게 바치는 착하고 순박한 청년은 청년을 시기하는 시종관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거만한 여왕의 마음을 얻어서 여왕의 시종관이 됩니다.

차갑고 거만한 여왕도 순수하고 착한 청년의 진심에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립니다.

마녀의 성.

거대한 성에 홀로 사는 마녀, 사람들은 나무와 쇠, 불과 대포 등으로 마녀의 성을 공격하지만 마녀는 꿋꿋하게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자신의 성을 지켜냅니다. 이 모든 광경을 참을성있게 지켜본 청년은 마녀의 성으로 혼자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무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고 마녀는 말합니다. 공주와의 결혼 약속을 지키겠다는 왕의 전갈에 청년은 자신은 마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녀와 함께 성에서 살겠다고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강인한 여성과 그 여성의 가치를 알아본 인내심이 강한 현명한 남성의 바람직한 결합, 정말 멋집니다.

가난한 강도와 할머니의 가운.

가난한 강도가 값비싼 할머니의 가운을 빼앗고자 할머니를 업고 가지만 엄청난 다리힘을 가진 할머니에게 꼼짝 못 하고 밤새도록 뛰어다닙니다. 기진맥진해서 할머니의 집에 도착한 후 할머니는 강도에게 가운을 벗어줍니다. 무엇에 홀린 듯 묘하게 아름다운 이야기. 서구인들 역시 동양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요.

잔인한 미래 여왕과 조련사.

자신에게 청혼하는 남자들과 달리기를 한 후 진 남자들을 살해하는 그리이스 신화의 아틀란타처럼 미래 여왕은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이 찾을 수 없도록 깊이 숨지 못 한 남자들을 처형합니다.

여왕의 막강 레이저에 잡히지 않은 남자가 없었는데 새 조련사 파블로만은 여왕의 곁에서 레이저를 피합니다.

파블로가 레이저에 잡히지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분명하다며 슬퍼하는 여왕은 겉모습은 냉정하고 강해보이지만 속마음은 한없이 외롭고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여성입니다.

여왕의 독백을 다 들은 조련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왕은 조련사에게 달려갑니다.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 이제 와서 자존심을 내세우면 뭘해?"

때로 인간은 냉소와 독설로 무장하고 몹시 괴퍅스럽게 위악을 떨기도합니다. 하지만 먼저 날을 세우고 사납게 눈을 치뜨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내 안의 나약함을 들키고싶지 않아서입니다. 나약함으로는 지켜낼 수 없는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엄을 잃지않기 위함이지요. 이해받지 못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동정받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으니까요. 이런 앙칼진 마음으로 무너지는 자신을 꼿꼿하게 세울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위악 쯤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 위악을 꿰뚫어 본 사람 앞에서라면 한 번 쯤 무너져주는 센스~ 사랑스럽겠죠?

키스하는 왕자와 공주.

개구리와 달팽이로.

왕자와 공주는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며 연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맹세하지만 개구리가 된 왕자에게는 키스할 수 없다는 공주, 개구리 왕자의 기습 키스에 달팽이로 변하고 맙니다.

키스를 할 때마다 개구리와 달팽이로, 나비와 사마귀, 물고기와 거북이, 코뿔소와 벼룩, 사냥개와 기린, 코끼리와 고래, 돼지와 황소로 변해가는 왕자와 공주, 이렇게 볼 꼴 못 볼 꼴 다 봐야 어디 가서 사랑 한 번 해봤다고 명함이나마 내밀 수 있겠지요?

사랑은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면서 단단해지는 것이니까요.

키스 끝에 공주와 왕자로 바뀐 왕자와 공주

마지막 키스 후에 '왕자와 공주'는 '공주와 왕자'로 바뀌고 맙니다. 어쩌면 좋아, 내가 공주가 되다니, 내가 왕자가 되다니….

공주 : "내가 사냥을 할 동안 당신은 바느질을 하면 되요."

왕자 : "난 바느질 못 한단 말예요."

공주 : "곧 익숙해질거에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증명되는 재미있는 대사죠? 다 하기 나름이라니까요.

모든 것을 다 가진 동화 속의 완벽한 왕자가 아니라 소심한 왕자의 진정한 용기, 가난하지만 순수한 청년과 아름답지만 외롭고 거만한 여왕, 괴기스럽지만 마음 따뜻한 할머니와 강도, 오랜 시간 혼자서 자신을 지켜온 마녀와 그 마녀를 사랑하게 된 청년, 외로움을 들킬까봐 잔인하게 살인을 일삼는 여왕의 깊은 외로움을 꿰뚫어본 조련사, 온갖 남사스러운 꼬라지 다 들키면서도 끈질기게 사랑의 끈을 놓치않은 왕자와 공주, 이젠 입장 바꿔보는 일만 남았군요.

익숙한 동화의 결말과 구태의연한 해피 엔드를 통쾌하게 뒤집는 기발한 반전, 기상천외한 상상력에 의해 아무렇지도않게 뒤바뀌고 깨어지는 남성성과 여성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정말 유쾌하지 않나요?

타고난 호기심으로 구경이라면 다 좋아하는 나는 특히나 불 꺼진 객석에서 훔쳐보는 환하게 빛나는 영화 속 세상이야기에 빠져서 가끔은 현실과 영화의 판타지를 넘나들며 혼자 놀기의 내공을 쌓고 있다. 첫 돌을 맞이하기 일주일 전에 앓게 된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3급의 라이센스를 가지고 현재 한국DPI 여성위원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