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화원

오원 장승업의 영모도대련 종이. 수묵담채. 135.5×55.0cm 19세기 후반

신분의 벽으로 불운했으나 호쾌하게 한세상 살다간 장승업이 이 그림을 그릴때는 신기에 가까운 기운으로 그렸을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 가슴으로 밀려들어오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정말 가슴을 쓸어 내려야만 했습니다.

3주전 격주를 반복해 조선말기회화전의 그림을 리움에서 만났습니다. 장승업(1849-1897)의 <영모도>를 실제로 보며 매번 느끼는것이 있다면 그의 혼이 마치 살아있는듯이 그림에서 꿈틀거림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산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절지등 그가 그린 그림의 소재는 실로 다양했습니다. 역시 조선 최고의 화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홀연히 사라져 간줄 알았던 그에게 제자가 있었으니 안중식(1861-1919)과 조석진(1853-1920)등이 오원풍의 그림을 그렸다는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러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의 화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

그가 이 그림을 그릴때의 심경은 필경 최고조의 감흥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오십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그린 그림처럼 이처럼 생생하게 전달되는것은 또 무엇이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 가는것은 또 무엇인지말입니다..

이러한 예술의 맛과 멋을 아는 고종은 장승업을 궁중화원으로 불러 들여 그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 했습니다. 고종은 국가 경영에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런 멋과 맛을 아는 그는 무척 섬세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주인공이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서양의 그림에 익숙해져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를 보면 공연히 낯설거나 주눅부터 드는건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없는 오른쪽 왼쪽 글(화제)은 무슨 뜻인지.. 행서체로 흘려 쓴 한문 글씨는 영어보다 어렵습니다.

우리시대는 익히 조선조 화가의 이름이라도 들어봤지만 현대를 과학의 시대라고 하니 지금 한국의 청년들이 조선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느낌을 전달 받을 수 있을것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장승업의 그림을 보면 느끼겠지만 남종화와 청조의 화풍을 재 해석해 그 만이 그릴수 있는 조선조 최고의 화풍을 정립했지요. 추사를 대표로하는 남종 문인화와는 구별되는 화풍이라는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파격과 전통

이미 조선시대에 한류로 인기 절정이었던 추사는 인문학의 대가이자 파격의 예술을 구현했습니다.

죽노지실. 예서 30 133.7㎝

추사 김정희야말로 경탄하지 않을수 없는 파격적인 예술가 였습니다. 글씨를 그림으로 그림을 글씨로라는 동양미학을 작품으로 보여준 그는 시대를 초월한 파격미로 전통의 서書 예술을 깬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서양에서 서예를 예술로 해 온 히스토리가 있었다면 그를 필시 피카소를 능가할 예술가로 손 꼽았을 것입니다.

추사의 작품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당시 조선의 문인이나 화원들이 쓰던 화선지나 비단천인 지필묵을 떠나 때로는 청나라를 왕래하는 사신들이 간신히 구해 추사에게 전달했다는 면이 미끈 미끈한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붓은 족제비털로 만들어진 것을 사용했다는데요.. 아무리 뛰어난 서예가들도 추사가 사용한 면이 미끌거리는 종이앞에 누구든 두려움 부터 생길것입니다. 왜냐면 붓을 대자말자 그대로 미끄러져 버리는 까다로운 종이거든요. 추사는 그런 미끄러운 종이위에 마음가는대로 그림이든 글씨든 요리를 했습니다.

추사 150주년을 맞아서인지 부스를 따로 마련했더군요.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예서<죽로지실>을 보면 붓이 운동하고 지나간 흔적이 눈으로 보이지요. 그 지나간 흔적에는 붓털 마저도 선명하게 드러나니 그 누구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척 경이로운 파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보물 ?호인 <반야심경>도 보였는데 단정한 구양순 해서체로 쓰여진 서첩이지요.

추사의 제자로 조희룡, 전기, 허련은 많이 알려져있는 문인화가들 입니다. 추사의 마니아로 알려진 조희룡은 추사보다 3살 아래에 불과 했지만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추사는 조희룡의 그림에서 문자향 서권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허련의 문인화는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데 그것은 문자향 서권기 가 보였기 때문이라나요.

그렇게 조선말기 회화를 지나가다보니 흥선 대원군(1820-1898)의 <괴석묵란도>를 만났습니다. 춘난을 그린듯한 이 난은 아주 귀한 난이지요. 제주도의 습지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춘난을 자유로운 필획으로 아주 흔쾌하게 그린듯이 보였습니다.

난잎의 끝은 날카로왔고 그런 난초화를 바라 보니 대원군은 직관이 무척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요. 추사도 대원군의 난을 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고 싶은데로 향하고있는 난획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서 저물어가는 조선을 붙들고 쇄국이라는 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흥선 대원군의 고뇌가 읽혀 지는듯 했습니다.

민영익(1894-1914)의 노근난초

이어서 묵난과 묵죽으로 명성을 떨친 민영익(1860-1914)의 난잎은 끝이 잘려진듯한 난화를 그렸는데 여백없이 난잎이 촘촘히 밀집되었으되 공간감이 살아 있어 보였습니다. 민영익은 당시 인터내셔널한 청조의 문인화가 오창석외 문인들과의 교류로 독특한 난초화를 구축했지요. 민영익 난초화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현대로 이동하면서 가장 보편적인 난화로 발전 했습니다.

왕실의 외척으로 19세의 나이로 조선의 권력을 좌지우지한 황당한 역사의 인물이지만 덕분에 일찌감치 서구 문화에 눈을 뜨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목을 빼고 조선의 하늘을 바라보며 조국을 그리워하다 결국 돌아오지 못한채 타국에서 운명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유폐된 대원군의 등극을 앞장서 가로 막았던 인물이었지만 이런 전시를 통해 두사람의 너무나 상반된 난초화을 보며 조선 말기를 휘몰아 친 구한말의 운명도 잠시 생각났습니다.

새로운 발견 채색화, 화가들을 새롭게 조명

남계우(1811-1888)의 화첩도외 나비의 화접도

남계우는 나비를 전문적으로 잘 그린 화가였습니다. 사대부가문의 화가로 알려진 남계우의 화첩도는 원색톤의 채색과 마치 채집한 나비처럼 정교하게 그려 놀랐습니다. 얼마나 정교한지요.. 조선말기회화전을 기획한 리움은 자칫 우리의 눈에서 잊혀질 화가들을 새롭게 부각시킨 뜻 깊은 전시였습니다.

이미지출처 : 리움미술관

지전 김종순은 태어나 첫 번째 생일이 되기 바로 전 소아마비를 앓았다. 어릴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지전은 몇 번의 그룹전을 하고 난 후, 그냥 그림 그리는 일이 심심해져서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1000호의 화선지위에 올라타고 앉아 음악을 그리는 일(퍼포먼스)을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언론매체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지전의 화두는 '청각적 시각, 촉각적 시각'이다. 그녀는 음악을 그리는 일은 새로운 방식의 일이어서 일상에서 거의 유배된 생활 같아 가끔은 마음이 저릴 때도 있지만 많은 예술가들의 삶을 쓰면서 위로 받게 되었다고. 최소한 평등한 인간의 모습을 성실하게 기록함으로써 이웃과 소통하며 그녀가 소망하는 평등한 세상이 비록 희망뿐이더라도 그 표현의 여러 기록중 하나이고 싶기 때문이다. 18회, 19회 미협에서(국전) 2번 입선. 이화여대 경영연구소 蘭谷書會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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