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대체로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지금 뭔가에 대한 것도 지금 소크라테스가 봤다면 결과적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 소리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찬찬히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욕구라는 것은 삶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동력입니다. 욕구가 없으면 결국 사람은 나태해지고, 결국 삶은 의미 없게 변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욕구가 변질되는 것도 문제겠지만, 일단 욕구가 없다면 삶 자체의 의미도 없을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의 고승이라고 해도 그것이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궁극적으로 욕구라는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와 철학적 욕구가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 무엇이 먹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결국은 욕구가 부르는 결말입니다. 결국, 오늘 먹게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결과물로 그렇게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욕구가 없다는 것은 결국 삶을 어떻게 살지를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는 궁극적으로 돈을 그 욕구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세력의 비판은 겉에는 민주주의 이런 말을 했겠지만,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 없이 무작정 내지르려는 성질이 너무 셌던 것, 즉 ‘개인이나 자기 패거리의 알량한 욕구를 국가의 비전이나 정책으로 삼으려는 것’이 결정적인 비판의 끝에 있을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새로운 장애인 정책 패러다임으로 ‘개인예산제’라는 장애인 예산정책을 ‘밥상부터 뒤집어엎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말이야 좋은데, 그 제도에서 구상한 것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결론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국가가 알지 못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장애인 개인예산제를 찬성해왔습니다. 이는 복지서비스가 내게 필요한 것이 맞춰져 있지 않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은 A인데 식당에 갔더니만 B를 내놓더라’라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예산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대안은 그 ‘너 자신을 알라’는 답안이 있어야만 이 문제를 풀 수 있음을 빼먹은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내게 필요한 복지 예산은 내 욕구에 맞춰서’라는 기본 철학입니다. 그런데 아직 윤석열 정부는 이 ‘내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도, ‘내 욕구’를 뭐라고 정리해서 가지고 와야 하는지 이런 것 등에 대한 답변이 없습니다. 물론 아직 새 정부 출범 시점이니 대충 ‘개인예산제로 간다’라는 말 정도만 했을 뿐, 이제 ‘당신 욕구가 뭐에요?’라고 물어야 할 시점이 언젠간 다가올 것입니다.

제가 생활에서 독립채산제를 따르고 있지만, 그 예산 배분을 잘 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월간 예산을 수립하고 그에 걸맞게 예산을 집행코자 애쓰고 있습니다. 언제나 100% 예산이 딱딱 들어맞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 여기에 얼마큼 썼는지 규모 자체는 알 수 있어서 재정 추계를 대충이라고 알 수 있게끔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됩니다.

필자의 2022년 5월 예산·결산이 적혀있는 전산가계부 화면. ⓒ장지용

무슨 어렵게 영기준예산(언제나 처음부터 0을 기준으로 짜는 예산제도)이니 계획예산(정책별로 짜는 예산제도)이니 그런 것은 행정학에서 이야기한다지만, 제 예산이라는 것은 매달 짠다고 해도 매우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욕구가 갑자기 톡 튀어나와서 예산을 졸지에 더 쓰거나 덜 쓰는 욕구 자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런 구조의 예산입니다. 실제로 이번 달 결산을 해보면 아마 의복비 예산이 지나치게 많은 금액인 30만 원 넘게 더 지출된 것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원인은 간단하게도 새로 산 구두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어떤 것은 욕구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서 제 개인 예산서에서 형식상 5만 원을 책정해놓고 쓰일 리가 없다는 예상을 했다가 큰코다치는 예산 구조가 언제나 제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오류 때문에 예산 책정은 A였으나 결산을 해보니 B가 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제 욕구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은 항상 인정하고 있고, 최종 결산을 할 때 고려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신간 서적이 나오거나 새 컴퓨터 게임이 출시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사는 통에 비용이 더 드는 일도 있습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결국 ‘내 욕구에 맞춘 예산제도’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 욕구가 곧 예산의 원칙이 되는, 예산 배분을 ‘예산에 인원수를 맞추는’ 것이 아닌 ‘내 욕구에 예산을 맞추는’ 방식의 전환이라는 점에서는 혁신적인 구조인 것은 인정합니다. 현재 장애인 관련 예산 중 ‘내 욕구에 예산을 맞추는’ 방식은 지하철 요금 무료 이외에는 제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가 시작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큰 과제는 ‘장애인 각자의 욕구를 아는 것’이 큰 과제이자 첫 과제입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를 제일 먼저 규명하는 것이 있어야만 전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 개인예산제 설계 과정에서 내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절차는 처음으로 개인예산제를 실험한 서울특별시에서의 시도에서도 부분적으로 참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 정도 단위에서 집행되는 방식이므로 간단히 조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은 전국 다 하는 제도로 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예산을 만들려면 결국 나 자신의 욕구를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욕구에 맞는 예산을 국가에서 지원하려면 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국가가 알고 있어야 하거나 알려줘야 합니다. 발달장애인법에서는 개인별지원제도를 도입했는데, 결국 이 규정을 적용하려면 발달장애인 당사자, 보호자 등의 의견을 다 듣고 그 뒤에 최종 지원 조항이 결정되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개인예산제 진행 방법에 도움이 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발달장애인법의 개인별지원제도의 구조를 벤치마킹해서 욕구를 파악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고, 거꾸로 개인별지원제도에 규정된 조항을 시행하기 위한 예산 배분 방침으로 개인예산제를 채택할 수도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장애인 등록제가 의학적인 것에 집중했다고 폐지하자는데, 이를 거꾸로 ‘장애인 개인별지원제도 프로그램에 등록한 사람’으로 장애인 등록제를 전환할 수도 있고, 장애유형은 ‘장애인 개인별지원제도의 기본 패키지 유형’등으로 변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가장애보험 제도 같은 방식 등도 참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결국, 따로 욕구를 알아보는 절차를 만들건, 발달장애인법의 개인별지원제도를 벤치마킹한 방법이건 간에 결국 장애인 개인예산제의 성공은 ‘내 욕구를 어떻게 알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이루는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오늘 대한민국의 장애인 개인예산제 논쟁을 바라보면서 평론을 했다면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너의 욕구를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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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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