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오래 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에 진심인 분이셨다. 내가 어릴 때부터 한국이 싫다며 미쿡 미쿡~ 하셨고, 미국 형제초청(70년대 후반에 이민을 간 고모의 초청) 이민을 이미 신청을 해 놓으셨다. 내가 다치고 나서는 더더욱 미국에 가야 한다며 신청한 이민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다리셨다.

그러다 내가 22살이 되던 해에 형제초청 이민이 성립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두 번이나 미국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했건만 계속해서 추가서류를 요구했다.

결국은 미국법상 만 21세가 넘은 자녀는 가족에 포함이 안 된다는 근거를 들어서 나를 제외한, 부모님과 여동생만 영주권을 받았다. 아마도 나 같은 장애인을 받아주면,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복지 혜택을 줘야 하기 때문에 거절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만 미국을 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아빠는 취업이민도 시도해보셨지만 내 건강검진에서 계속 거절되었고,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부모님은 내가 갈 수 없으니 결국 영주권을 포기하셨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셨던 아빠. ⓒPxHere

나는 그때까지 학창 시절도 즐거웠고, 비록 고등학교 때 장애인이 되었어도 한국에 사는 게 좋았다. 또 대학 시절도 너무 행복할 정도로 친구들, 선후배들과 재미있게 보냈다. 큰 이해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순수한 시절이었으니 나의 장애에 대해서 이해를 많이 해줬고, 많이 도와 주었다. 그래서 그 때까지 나는 크게 장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생활은 정말 나에게 좌절과 패배를 느끼게 해주었다. 나라는 사람을 보기 전에 장애라는 편견에 가려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전자, 컴퓨터 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하면서 나는 열정 페이만을 받고 밤을 새서 일하기를 수도 없이 했다. 비장애인과 똑같은 열정과 능력을 회사에서도 요구했고, 나도 똑같이 대우받기 위해 젊음의 열정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꼬리뼈의 욕창을 얻게 되었다. 비장애인이 똑같이 앉아 일을 하는 것과 아예 감각 없이 앉아 일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나도, 고용주도, 같이 일하는 동료도 몰랐었다.

그 다음으로 일했던 웹디자인 회사도, 웹개발 회사도 다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관련 회사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감 기일에 맞추기 위해 야근을 밥먹듯 해야 하는 고충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커다랗고 심각한 욕창을 얻게 되었다.

장애에 대한 편견과 좌절, 욕창으로 힘들었던 사회생활. ⓒPxHere

그 이후에 컴퓨터 관련 일을 하기 싫어서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라도 나는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자리 면접에서 나는 장애를 이유로 거절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운 좋게 일자리를 얻게 되었어도 대소변 실수를 했을 때, 화장실에서 오래 뒤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근무 태만으로 오해를 많이 받아서 짤리거나, 내가 시선을 견디지 못해 그만 둔 적이 많았다.

​90년대 다치고 장애에 대한 정보도 전무했고, 2000년을 지나오며 후반까지도, 아니 뭐 지금도 인식의 전환이 안 된 곳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예전, 장애에 대한 인식은 병자, 환자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시선이 가득하던 때였고, 친구들과 커피숍을, 술집을 가도 휠체어 타는 나를 보고 꺼리고 나가라고 문전박대를 당한 적도 많았다.

정말 좌절감을 많이 겪고 방황하던 중에 자기계발 회사의 교육을 우연히 알게 되어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육을 들으며 나는 정말 자신감과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당시 그 회사의 OO 팀장님과 친해졌다. 그분은 나를 장애인으로 바라보지 않으시고 나의 능력을 알아봐 주셨다. 지금도 정말 은인으로 모시는 분이다.

그 교육회사의 시작은 OO 팀장님 밑에서 교육 진행을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부터였다.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프린트해서 강의실에 세팅하고, 컴퓨터와 빔프로젝트를 설치하고, 교육 자료를 ppt로 만들어 드리고, 그 회사의 홈페이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1~2년을 전국의 교육을 따라다니며 교육 진행 보조를 했고, OO 팀장님이 교육 마케팅으로 기업체에 가서 우리 교육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세일즈 능력에 대해서도 배웠다. 이후에 강사과정도 수료하게 되었고, 물론 OO 팀장님이 나를 좋게 말씀해주시고 내세워주신 부분이 컸다.

하지만 나도 너무 신이 나서 정말 열심히 했고, 교육생들도, 회사 분들도 내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주 멋지게 잘한다고 긍정적으로 봐주셨다. 회사의 사장님도 아주 좋게 봐주셔서 부산, 경남의 교육을 맡아 진행을 하고, 강의도 하게 되었다. 이 교육회사에 있던 4~5년은 정말 신이 나서 일했고, 즐거웠고 행복했던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5년 차쯤 되던 해에 그 회사의 사장님이 일신상의 이유로 다른 분이 회사를 맡았다. 그러면서 회사가 지역별로 쪼개지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도 나가면서 나도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만 두게 되었다.

즐겁게 일했던 교육회사도 그만 두고 나니 더 큰 좌절이 왔다. ⓒPxHere

그렇게 신나고 좋아서 했던 일을 그만 두고 나니, 더 큰 좌절이 밀려왔고, 방황을 많이 했다. 그 회사를 그만 두고도 생활비를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니, 누군가 일 해볼래? 라고 묻는 것은 거의 모두 거절하지 않고 다 했다. 그렇게 제안하는 일자리 외에도 지역 신문과 인터넷 구인 광고를 열심히 찾아보고 꽤 많은 일을 했었다.

하지만 나도 마음이 잡히지 않으니 제대로 진득하게 일을 못 했고, 타인으로부터 외부로부터 나만 자꾸 뭔가 억울함을 겪는다는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그런 힘듦을 겪으니 나만 영주권을 못 받아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아쉬움과 욕구가 더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받았던 편견과 시련이 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라는 원망이 생기고 나도 자꾸 한국이 싫어졌다. 미국으로 가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우리 아빠가 가졌던 막연한 환상의 아메리칸 드림이 나도 생겼던 것 같다.

나도 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박혜정

이렇게 내가 아메리칸 드림이 생겼고, 갈 방법이 없을까 정말 막연히 생각만 하던 그 즈음, 2006년, 내가 29살이 되던 해였다. 우리 집의 유일한 미국영주권자인 내 동생은 약사라는 좋은 직업을 버리고 미국 뉴욕을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동생의 말에 나도 얼른 같이 가겠다고 따라 붙었다. 내가 여태까지 모은 2천만 원을 가지고 가서 있을 때까지 있어 보고 안 되면 오고, 더 있고 싶으면 얘기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내 성격을 아니까 말리지는 않으셨지만, 우리 부모님은 이미 아셨을 것이다. 난 하고 싶은거 금방 결정해서 하지만 금방 돌아올 애라는 것을, 내 동생은 하고 싶은거 오래 결정해서 하지만 절대 금방 돌아오지 않을 애라는 걸 말이다.

2006년, 29살의 나는 뉴요커를 꿈꾸며 떠났다. ⓒ박혜정

결론만 얘기하면, 나는 미국 뉴욕에서 사정(욕창 문제)이 나름대로 있었지만, 2천만 원 소진하고 8개월 만에 돌아왔고, 내 동생은 미국에서 더 공부한 뒤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며, 좋은 신랑 만나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그때 욕창만 아니었다면, 영어도 조금 더 배우고, 미국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을 찾아볼 시간이 없었기에 약간의 아쉬움은 든다. 꼬리뼈 욕창을 지금도 달고 있지만, 왜 하필 그때 그렇게 진물이 줄줄 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을까 원망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있어볼 걸 하는 생각도 한 적이 많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내가 계속 살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잘 됐고, 안 됐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동안 동생이 부러웠다. 하고 싶은 걸 그래도 끝까지 이룰 수 있는 의지와 상황이. 하지만 내가 한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난 참 합리화도 잘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이라 후회가 별로 없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때 나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고, 그때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비싼 물가의 미국 뉴욕에서 2천만 원으로 8개월을 살기 위해 나름대로 엄청 힘들게 생활을 했었다. 또 너무 행복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때 오히려 더 힘든 순간이 많다고 느꼈다. 불가피한 욕창이라는 상황이 생기면서 돌아오긴 했지만,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

2006년 당시 어학원 근처의 뉴욕 맨하튼 거리 모습. ⓒ박혜정

벌써 그때가 16년이 지났다. 물론 지금 생각했을 때지만, 만약 그때 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사랑하는 남편은 만날 수 없었다.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분신인 딸들 현혜는 없었을 것이다.

어머! 세상에!!!

그때 미국에 계속 있었으면, 나 큰일날뻔!!! ㅋㅋㅋ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그 이후에 이뤄진 모든 일에는 감사할 뿐...

내가 이 순간도, 모든 걸 감사하며 사는 이유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박혜정 칼럼니스트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 현혜(필명), 박혜정입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 건물에서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척수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중증장애인으로 그래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가족, 친구들과 우리나라, 해외를 누비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여성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수많은 일을 하며 좌충우돌 씩씩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시련은 축복이었습니다>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