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매사 엄청난 간섭과 지나친 관심의 엄마가 싫었고, 그걸 벗어나고 싶었는데, 다행히 장애인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대구대학교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졸업을 한 후에도 대구에서 직장을 잡으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서울 쪽은 나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지 크게 생각도 못했고, 결국 대구에서는 직장을 잡지 못하고 부산으로 다시 왔다.

졸업 후 부모님 집에서 같이 1년 정도 지내며 계속적인 보호와 간섭을 받았다. 어디 갔다 돌아오면 엄마는 나를 업어서 침대에 눕혀주고, 화장실 문제가 있으면 새벽에도 뛰어 나와 도와줬다.

내가 도와 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난 그걸 원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는 가슴 밑으로 마비라 손을 멀쩡하게 쓰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해줘도 난 할 수 있다고 해도 엄마는 언제나 해줘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고, 나의 의사는 상관없이 자신이 무조건 해 줘야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또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괜찮다는데, 내가 할 수 있다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하는 엄마였다. 지금은 엄마의 크고 깊은 사랑이라 이해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독립을 하려면, 어쨌든 경제적인 부분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고 나는 어떻게든 내가 어느 정도 원하는 직장과 경제력을 갖춰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할 즈음에 교육 회사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는 나를 크게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과 재밌게 일하고, 적성이 맞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회사를 다니며 인정받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도 되는 시점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부산과 경남을 오가며 일을 해야 하는 거여서, 김해에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하는 원룸형 아파트에 계약금을 걸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난 김해에 방을 계약을 했고,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때 내가 다친지 9년차, 내 나이 26살 후반, 27살 넘어가던 2003~4년^^ 우리 엄마는 그 때 난리가 났다! 어떻게 네가 혼자 살 수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느냐~ 혼자 어떻게 밥을 해 먹고 청소를 하며, 혼자 어떻게 대소변 처리를 하며, 혼자 어떻게 지내며 온갖 걱정으로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난 계약금을 걸었고, 무조건 독립을 할 거라고 말을 하니 30살만 되면 독립하라고, 정말 엄마는 사정을 할 정도였다. 엄마와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아빠가 하신 말씀은 ‘네가 계약한 집을 한번 보자~’라고 하셨다.

다음 날 내가 계약한 김해 OO동의 아파트를 보시고 아빠가 하신 말씀은 월세 25만원이 쉬운 건 줄 아느냐, 그리고 이 좁은 원룸에서 사는 게 될 것 같으냐고 하시며, 김해 장유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를 보자고 하셨다. 김해 장유는 그때 당시 막 신도시로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라 시설도 다 잘 되어 있었고, 마침 맞게 중도금을 치르지 못한 급매물을 완전 싸게 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의 독립 생활이 시작되었다.

필자의 휠체어. ⓒ박혜정

처음 한 달 정도는 걱정이 된 엄마가 자주 와서 반찬과 빨래, 청소를 해주고 갔다. 그 뒤로는 제발 오지 말라고 내가 말도 했고, 막상 해보니 모든 게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다 할 수 있었다.

반찬도 검색만 하면 다 알려주는 세상이고, 배달도 편하게 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거고, 청소는 힘들어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걸 하나씩 해보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자체가 나에게는 기쁜 일이었고, 혼자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일이었고,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언젠가부터는 장애인 활동 보조라는 서비스가 생겼고, 어쨌든 내가 필요한 부분을 보조해 주는 사람이 국가에서 지원되는 것이었다. 중증 장애인이 원하는 부분을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도와주는 서비스다. 이게 생기고 난 뒤로는 크게 부모님의 도움 받을 일도 없었고, 혼자 씩씩하게 더 잘 살 수 있었다.

몇 달 전 TV에서 독립만세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한 번도 혼자 살아보지 않았던 연예인이 생애 최초로 독립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프로그램이다. 독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있을 정도이니 비장애인들도 특히 여자가 부모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하기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더군다나 중증의 여자장애인인 나 같은 사람이 독립을 하기까지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을 아빠가 그나마 지원해주셨으니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독립을 하고 난 뒤는 오롯이 나 혼자 어떻게든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니 정말 어려운 일이 많았다.

독립만세 이미지. ⓒ박혜정

한번은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다가 휠체어가 바람이 없었는지 밀려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난 그때까지 바닥에서 휠체어나 침대로 올라오지 못했는데, 가슴 밑으로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너무 힘든 일이었고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서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노력을 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해 보는 수 밖에. 무조건 팔 힘으로 휠체어에 올라가려니 다리가 힘이 없어서 버텨주지도 못하고 도저히 안되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물건·베개나 책 등을 적당히 쌓고 먼저 엉덩이로 거기 위에 올라 앉고(이것도 쉽지 않았다ㅠㅜ), 그 다음 휠체어로 올라가는데 1시간 이상을 버둥거리다 겨우 겨우 올라갔다. 너무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고, 나는 여자 척수 장애인들 중 바닥에서 휠체어로 올라가는 진짜 몇 안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너무 뿌듯했다.

또 한번은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허벅지에 얹고 식탁으로 가는데, 반찬 유리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져 버렸다. 유리 조각들은 바닥 곳곳에 널부러져 버렸고, 들어 있던 반찬과 반찬 국물도 엉망으로 어질러졌다.

유리 조각에 휠체어 타이어가 터질 수 있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휴지나 물티슈, 걸레 같은 것도 가까이에 없어서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때 딱 보인 것이 싱크대 저 멀리에 있는 행주가 보였다. 그런데 이런 행주가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게 내가 있는 싱크대 쪽에 온갖 조리도구들이 좀 있었다.

뒤집개로 행주를 내 쪽으로 약간씩 가져오려고 하니 안되고, 주방 칼로 해도 안되고, 국자로 해도 안되고ㅠㅜ 길이가 제일 긴 튀김 젓가락이 겨우 닿았다. 아고, 힘들다~ㅋㅋㅋ 행주를 겨우 손에 넣고 엎드려서 휠체어 주변부터 유리조각을 살살 밀어가며 닦았다.

한참을 엎드려서 휠체어 주변을 깨끗하게 해 놓고는 베란다에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 와서 나머지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청소기를 가져와서 마무리~! 힘들었지만 내가 어쨌든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또 기특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휠체어. ⓒ박혜정

실제로 이렇게 독립을 해서 6년을 혼자 살아보니, 그 시간 동안 내가 완전 더 성장했다는 걸 확신한다. 또, 내가 내 삶을 더 책임지고 살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삶을 온전히 나를 위해 열심히 살 수 있었다.

사람마다 상황과 여건의 차이, 생각의 차이가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혼자 여행을 하거나 혼자 살아보는 것을 꼭 해보길 권한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사람을 참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값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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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칼럼니스트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 현혜(필명), 박혜정입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 건물에서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척수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중증장애인으로 그래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가족, 친구들과 우리나라, 해외를 누비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여성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수많은 일을 하며 좌충우돌 씩씩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시련은 축복이었습니다>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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