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 앞에 설치된 점자블록. ⓒ배융호

지금까지 편의시설 설치 기준은 정부와 전문가가 장애계의 의견을 청취하여 만들어 왔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장애인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자문이나 공청회 형식으로 의견을 청취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편의시설 또는 접근성 기준은 사회적 합의라기보다는 전문가와 해당 유형의 장애인의 의견이 반영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이 아닌 담당 공무원, 건축가, 시설주, 다른 유형의 장애인 등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사회적 합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쮜리히의 광장에 설치된 시각장애인 안내선. ⓒ배융호

오래 전 이야기지만, 스위스 쮜리히시의 사례는 사회적 합의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준다. 당시 쮜리히시의 고민은 광장이나 역사 내에서 도시의 전체 분위기나 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시각장애인을 제대로 안내할 수 있는 안내 방법과 그것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쮜리히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시공무원, 시의원, 시각장애인 단체와 다른 유형의 장애인단체 등이 모두 모여서 방법을 논의했다. 다른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의 안내를 위해 사용하는 점자블록 재질은 설치비용도 많이 들지만, 파손이나 노후에 따른 보수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저렴하게 설치할 수 있고, 보수 비용도 저렴한 재료로 선택한 것이 횡단보고 선을 긋는 도료로 시각장애인 안내선을 설치하자는 것이였다. 횡단보도 선을 긋는 도료도 칠한 후에 약간의 높이가 있어서 시각장애인이 흰지팡이로 바닥을 긁을 때 감지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선을 긋는 것이어서 비용이 저렴했고, 지워져도 다시 칠하면 그만이었다. 유지와 보수도 편리했다.

또, 다른 국가들은 시각장애인들의 안내를 위해 노란색 계열을 사용했지만, 도시 보도와 광장의 바닥에 검은색이 많은 쮜리히 시에서 노란색 계열은 바닥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너무 눈에 튀어 도시 미관을 해쳤다. 그래서 검은색 바닥에서 시각장애인이 가장 잘 식별할 수 있으면서 도시 미관도 해치지 않는 흰색으로 합의한 것이다.

쮜리히시 역 내에 설치된 시각장애인 안내선. ⓒ배융호

우리나라도 이제 편의시설이나 접근성 기준을 정할 때 정부와 전문가 및 일부 장애인단체의 합의가 아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점자블록이다.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이 출입문, 계단, 횡단보도 등이 있다는 것을 알거나 목적지까지 따라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편의시설이다.

그런데 출입문 앞에 설치된 점자블록에 대해 휠체어나 유모차 등은 지나가기 불편하다는 의견, 횡단보도 앞이나 보도의 점자블록의 잦은 파손 또는 잘못 설치로로 인한 기능 상실 등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건축가나 시설주들은 점자블록의 재질과 노란색상이 건물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치를 꺼려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편의시설 또는 접근성 원칙이 마련되어야 한다. 편의시설 또는 접근성 기준은 편의시설 설치 방법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나가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기준이다.

첫 번째 원칙은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우선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기준이다.

앞의 점자블록 사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편의시설이다.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들이 횡단보도를 인식하여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고, 출입문을 찾거나 충돌하지 않도록 해주며, 계단의 시작과 끝을 알게 하여 안전하게 계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의 안내와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반면에 건축가와 시설주들의 건물 미관을 해친다는 의견, 유지 보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의견, 휠체어 사용자 등 일부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이 불편하다는 의견은 시각장애인의 안내와 안전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편의시설 설치나 접근성 보장 방법에 있어 의견이 상충될 때의 우선 순위는 중요도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미관 훼손과 출입할 때의 불편함이 안내에 반드시 필요하고 안전 보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필요성 보다 우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원칙은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며 효과적인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점자블록의 사례를 다시 이야기해보자.

현재 점자블록과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성안내시설이다. 출입문 앞, 계단 시작과 끝, 횡단보도 신호기 앞에서 음성으로 안내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을 향해 방향을 지속적으로 안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은 점자블록 중 선형블록이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가장 안전하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더 안전하고 편리하며 효과적인 방법이 나온다면 당연히 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덮개 때문에 끊어진 점자블록 중 선형블록. ⓒ배융호

세 번째 원칙은 지속 가능성이다. 지속 가능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지 보수가 편리하며 비용이 저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장애인에게 동일한 기능과 효과를 제공한다는 기본 전제 아래 세워지는 원칙이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동일한 기능과 효과를 갖고 있지 않다면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네 번째 원칙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기, 기구는 기능과 효용성만 중요하고 아름다움은 무시해도 좋은 게 아니다. 장애인 보조기기도 아름다울 수 있고, 편의시설이나 접근성 보장도 아름답게 할 수 있다.

건축가나 시설주들이 편의시설 설치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용과 외관의 아름다움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능성만 강조한 나머지 목재 건물에 철판 경사로를 설치하는 식의 보기 흉한 편의시설을 주로 봐왔기 때문이다.

유니버설디자인에서도 7가지 원칙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아름다움은 굉장히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모두가 편리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편의시설도 아름다워야 한다. 휠체어도 멋져야 한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도 매우 큰 효과가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마지막 원칙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함과 편리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휠체어 사용자만 편한 편의시설보다는 휠체어 사용자와 시각장애인에게 편한 편의시설이 더 우선 되어야 하며, 장애인에게만 편한 편의시설 보다는 장애인과 노인 또는 장애인과 어린이에게 편한 편의시설이 우선되어야하며, 더 나아가 장애인에게만 편한 편의시설보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편한 편의시설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니버설디자인과 장애물없는생활환경(BF) 인증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이제 우리도 편의시설 설치와 접근성 보장에 대한 원칙과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 원칙과 기준은 여러 장애 유형의 당사자들과 공무원, 시의회 또는 국회, 건축가 등 전문가가 함께 모여 합의하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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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융호 칼럼니스트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사무총장,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서울시 명예부시장(장애)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사단법인 한국환경건축연구원에서 유니버설디자인과 장애물없는생활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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