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나의 가족은 참 치열하게 살았다. 가난이나 생활고에 의한 것이 아닌 가족 간의 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항상 싸우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돈을 바라는 아버지,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돈을 가져가면서도 어머니에게 올바른 사랑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 어린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관계였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나는 두 분이 이혼하길 바랬다. 하지만 두 분은 이혼하지 않으셨고 그저 싸우셨다. 서로 간에 원하는 바에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가정에서 나는 도망치고만 싶었다.

학교생활도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어디가 남들과 다른 지, 언제나 한, 두 명은 날 싫어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이 싫어졌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고 있었고 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우연히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집에서 분리되었을 뿐인데 내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분명히 깨달아 버렸다. 나는 집에서 분리되야하고 그것은 단순한 나의 꿈이 아니라, 내 생존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2008년 입대를 할 때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입대하는 날까지 두 사람(부모님)은 다투셨고 입대하는 날에도 두 사람의 거리감만 내게 남았다.

이런 나이기에 군 생활도 쉽지 않았다. 위에서는 내리누르고 아래에서는 올라오고 군번은 꼬여서 분대장이든 뭐든 책임지는 일은 오래해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군생활 중 기도 제목은 하나였다. “가정의 평화”

이것을 기도하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당연히 나의 독립을 기도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다 어느덧 전역을 하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군생활 간에 그래도 얻은 것이 있었으니, 건강이었다. 평생 이렇게 건강해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유선 통신병이라는 힘을 쓸수 밖에 없는 보직에 당첨되어 살기 위해 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가 좋았기에 모든 일에 의욕이 넘쳤다. 공부, 운동, 인간관계 모두 잘 될 것 같았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감도 생기고 사회에선 뭐든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보니 그곳은 또 다른 군대였다.

집안 꼴은 귀신의 집이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은 각방을 쓴지 얼마나 된 것인지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실, 다른 방들, 부엌.

절망의 평원이었다. 전역과 동시에 다시 기도 제목이 독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때즘부터 내 다리에 통증과 피부염이 생기기 시작했다. 쭈그려 앉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한 통증에 지름 10cm 이상의 피부염, 누가 봐도 심각하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봐주지 않았다. 혼자 동네 병원을 전전하며 알아보았지만 동네 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대답을 주기 어려웠다.

딱 한 곳, 의외의 가정의학과에서 류마티즘을 얘기했지만 당시 나이든 사람이나 걸리는 질병으로 치부하던 나는 그 이야기를 흘려버렸다. 하지만 병증은 점점 심해졌고 특히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부염에 가여움이 극도로 치달았다.

그러다 결국 한 달만에 나는 대학병원에 찾아가야 했고, 어느덫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원인조차 판명받지 못하고 장애인이 된 지금, 나의 삶이 바로 나의 장애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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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섭 칼럼니스트 2010년 희귀난치성 질환 류마티스성 피부근염에 걸려 후천적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을 오직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다. 2020년 삶의 귀인을 만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써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로써, 근육병 환자로써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를 전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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