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진행된 서울시50플러스재단 (왼쪽 사진)과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오른쪽 사진) 면접 안내 표지판 ⓒ장지용

결국, 허무한 결말로 끝났지만 그래도 의미 있고, 극적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참 잘 해냈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면접시험을, 그것도 공공기관에서, 하루에 2번이나 치른 것이 말입니다.

사실 몇주 전부터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하 50플러스재단)과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하 사회서비스원)의 사무직 시험을 보기 위해 NCS 책도 사보는 등 노력하면서 시험을 쳤습니다. 특히 50플러스재단은 장애인 채용 리그로 응시했지만, 비장애인과 같이 풀었던 문제 중 응시생들 사이에서 ‘공포의 스테이크 문제’라고 불렸던 문제가 있음에도 필기시험을 통과했고, 사회서비스원은 장애인 채용 리그 없이 비장애인들과 섞여서 시험을 봤음에도 필기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저는 하루에 2번이나 면접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8월 5일 오전에는 50플러스재단을, 오후에는 사회서비스원 면접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일은 농담 섞어서 ‘빌려드림’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면접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그런 하루였습니다.

그 전날부터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특수 약물을 처방받았고, 인천광역시청의 청년 면접 정장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 정장을 찾아서 가져다 입는 등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5일 아침에 일어나면서 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50플러스재단 면접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있는 빌딩에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응시 장소가 공항철도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출구와 연결되어있어서 무사히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입구에 열 감지 장치가 설치되어있어서 열 감지 장치를 통과하고 들어갔습니다.

면접 응시를 위해 집합장소에 도착하고 나서 직원이 부정응시 방지를 위한 신분증 검사와 함께, 코로나19 감염 관련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문서에 사인하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 착용은 필수였습니다. 실제로 마스크 착용 관련해서 경고 사항을 알렸고, 면접 감독자들이나 면접관들도 마스크를 쓰고 면접을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30분간의 면접이 끝나고, 잠시 시내 다른 장소에서 지인과 점심을 먹은 뒤 다시 강남 COEX로 향했습니다. 바로 사회서비스원 면접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착해보니 이번에도 열 측정이 진행되었고, 손 소독을 해야 했으며, 이번에도 감염 사실이 없는 문서에 사인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증빙서류 제출을 위해 부르던 과정이 있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온라인 제출을 해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온라인 제출이 아닌 오프라인 제출이라 감염 관련 우려도 살짝 있었습니다. 50플러스재단도 같은 이유로 서류를 걷었지만, 이들은 온라인으로 서류를 걷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서비스원 면접에서 독특했던 것은 투명 칸막이를 면접관과 응시생들 사이에 놓고 면접을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면접 감독관들이 입실 전에 칸막이를 나눠주고 가져가게 한 다음, 면접 진행 중에는 칸막이를 설치했습니다. 다만 말할 때만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는데, 아마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구별하려는 조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쯤에서 결과를 말씀드려야겠는데요. 앞에서 허무한 결말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이 복선이었습니다. 네, 둘 다 최종 탈락을 했기에 허무한 결말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노력한 것에 비해서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것이니까요.

발달장애인이 채용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 상황 속에서 공공분야에 쏠리는 채용 관심도가 이것을 더 어렵게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어려운 조건에 놓여있는 제가 쓰러져도 면접까지 치르고 나서 최종 탈락에서야 쓰러졌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 면접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나지만, 발달장애인은 면접이라도 치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던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이 그나마 경기 후퇴를 선방했다고 평가받았지만 어쨌든 마이너스 성장률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으니 공공분야 채용에 관심이 쏠린 것은 사실이긴 하니까요. 그래서 경쟁률도 높았고 상대적으로 소외된 발달장애인의 도전도 힘든 것은 결국 사실입니다.

50플러스재단 시험을 치던 날이 생각됩니다. 그날은 장애인들이 다 같이 응시했던 하루였는데, 청각장애 응시생도 있었을 정도였고 발달장애인은 아마 50플러스재단에서도 가장 독특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유일했습니다.

앞으로 공공분야에 발달장애인도 응시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제가 ‘스타트’를 끊었으니, 앞으로 많은 발달장애인이 공공분야 일반 공채에 도전하기를 기원합니다. 누군가는 꼭 발달장애인 최초 공공분야 일반직 공채 합격자가 나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가 이룩하지 못했던 성과를 말이죠.

그리고, 저를 지켜봤던 어느 사람의 이야기대로, 저는 이것이 또 지나가게 된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평가대로, 저는 새로운 도전을 찾으러 또다시 알 수 없는 먼 길을 나설 것입니다.

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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