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우리는 코다입니다' 표지. ⓒ정민권

심호흡! 장애가 이야깃거리가 되는 걸 달가와 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인식을 가진 나로서는 장애를 다름으로 인한 것들, 특히 비장애와의 소통을 위해 관계의 줄여야 하는 현상학적이라거나,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극복해야 할 병리학적 부분에서 모자라거나 능력이 부족으로 개인적 가치가 소모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런 면에서 이름조차 생소했던 '코다 CODA'로서의 살아야 했던 이야기를 다룬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토대로 몇자 적어보려 한다. 이 이야기가 충분히 장애 학적 의미를 대변해주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8명의 장애인이 4가지(지체, 뇌 병변, 지적, 자폐성) 장애적 삶의 이야기를 풀어낸 책인 <행복추구권>도 다시 주목받았으면 싶다.

"코다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다."라는 프롤로그의 말에 격하게 공감됐다. 20년을 비장애인으로 살다 사고로 장애인이 된 후 30년을 살면서 나 역시 자주 경계인으로의 삶을 산다. 때때로 관념이 된 비장애인의 사고를 기반으로 장애를 바라볼 때 느끼는 답답함이라든가 괴리감이라든가. 그럴 땐 내가 장애인으로 갖게 되는 비장애인의 인식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일종의 공감이랄까? 웃음이 났다. 내가 근무하는 곳 위층에는 수화통역센터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농인이지만 청인의 말소리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이는 팔과 손이 내는 소리는 침묵이 아니다. 얼마나 말이 많고 시끄러운지 모른다. 청인이 내는 음성의 수다나 농인이 내는 수어의 수다나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똑같이 말 많은 사람들일 뿐이다.

읽어가면서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폴라가 떠올랐다. 농인인 부모를 대신에 여러 일을 해야 하는 현실과 가수가 되고픈 자신의 꿈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그 영화를 보면서 코다인 폴라에 집중하는 게 아닌 농인인 부모의 삶을 주목했었다. 어쩌면 나도 부모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폴라가 당연히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한편 우리가 예의라 부르는 관계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것들을 오디즘(Audism)으로 규정하는 저자의 말에 청인으로서 살짝 혼란을 느낀다. 일반적인 생체리듬을 보유한 보통의 사람이라면 잘 시간에 누군가 청소기를 민다면 화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게 오디즘이라는 식의 차별로 규정할 수 있을까 싶다.

도서 '우리는 코다입니다' 내용 중. ⓒ정민권

"농인과 청인이 함께 있는 곳에서는 이런 해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곤 한다. 양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릴 때 나는 청인인지 농인인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시험당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 읽기 전에는 장애라는 주제 혹은 장애로 인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그와 연결되어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너는 이제부터 장애인이야"라며 "더 이상 뛰거나 심지어 걷는다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일일 테니 정신 차리고 팔운동 열심히 해서 휠체어라도 탈 수 있게 해!"라며 내 상태를 규정해버린 의사처럼 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장애인에 대한 정체성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저자의 코다로서, 농인과 청인 사이의 정체성의 혼란이 가볍지 않게 느껴졌다. 이 문장에서 다시 한번 숨이 막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책이다.

"코다라는 이유로 행복할 수 있나?"

저자가 지인에게 코다라는 이유로 행복했던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너무 명쾌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행복에 있어 코다가 장애가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는 듯한 대답에 꽤 오래전이긴 하지만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나갔던 어느 학교에서 교육 시간을 마치고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손을 번쩍 들고 한 여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장애인이 되고 편해진 건 뭐예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 이후의 삶에서 편하다는 의식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닐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장애라는 지점이 '불편'이란 상황에 매몰되면 그가 사회적 활동으로 야기되는 유무형의 편익성 또한 무시되는 게 아닐까.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검색대를 프리패스한 거? 딱히 그 여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진 못했다.

사실 장애인이 되고 난 이후의 삶에서 겪는 불편함은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니라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장애가 만들어진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동시에 불편함을 겪을 수 있는 문제도 많을 테니 말이다.

또 미디어 등장하는 성공한(대부분 장애를 극복했다는 시선에 맞춰진) 장애인을 보면 득달같이 전화하셔서 '너는 노력하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라고 질책하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나로서는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지체 장애 때문이라기보다 지체 장애라서 겪는 일들처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이 점은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아 비교할 경험이 없지만 다른 이들의 경험을 빌려 보자면 그렇다.)

저자의 부녀가 입국수속대에서 당황해야 하는 일을 이리 먼 대한민국의 방안에 앉아 울컥해야 하는가. 타인에게 장애를 문제 삼지 않고 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왜 주변인이 나서느냐 하는 시선은 완벽한 장애인이 아닌 경계에 서있는 나로서는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장애의 유무를 떠나 그 사람 자체로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선의 불편함을 경험하고 나서야 무뎌지는 것인지 충분히 알기에. 과거에는 별일 아니었던 일들이 별일이 되고 난 이후 이런 일들을 별일 아닌 듯 같이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도서 '우리는 코다입니다' 내용 중. ⓒ정민권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또 하나는 우리 아이들의 정체성에 지체장애 아빠인 내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불완전한 보행을 하는 아빠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 바짝 붙어 자신의 팔을 붙잡을 수 있도록 내미는 아이들은 아빠와의 외출이 어떤 고단함을 주었을지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코다가 부모들이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자연스럽게 통역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비장애인으로 20년을 살다 갑자기 변화된 장애라도 여전히 호전적인 성격은 불쑥불쑥 튀어 올랐고 굳이 불쌍하거나 도움이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애 정체성이란 내게 줄곧 혼란스러운 문제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장애라는 것은 시혜적인 부분을 통해 장애를 옭아매고 규정하면서 길들인다.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최대한 많이 혹은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선 장애인을 앞세워 그들의 장애가 부각되는 쇼맨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회복지사가 적지 않고 이런 이들에게 장애는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는지 염려스럽다.

나는 그냥 나다. 장애라는 건 불편함 앞에 부각되는 특성일 뿐 시시각각 나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 친구도 아니고, 장애인 사회복지사도 아니다. 그냥 나의 정체성에는 장애는 아주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한편 이 모든 이야기를 차치하고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듣지 못한다는 것, 그로 인해 음성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청각장애로 규정하는 문화에서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 그래서 농인들 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장애와는 구분 짓는 것은 다른 장애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을 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묵직하지만 묵직한 만큼 가슴을 꽉 채우는 무언가 있다.

* 위 내용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일부 수정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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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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