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고 있는 민우. ⓒ최선영

한겨울에도 따스한 미소를 보낼 것 같은 그곳은 마치 모네의 그림을 보듯 평온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큰 호수를 닮은 바다는 고요한 미소를 보내며 옹기종기 모여 도란거리는 집들과 어우러져 낯선 민우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합니다.

민우의 이번 휴가는 처음에는 일본을 생각했었지만 양심 없는 일본의 행동을 보며 국내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잘못은 저지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지만 그 잘못된,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뒷이야기가 이렇게 억지스럽고 뻔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과 달리 잘못을 했지만 끝까지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실된 사과를 하는 독일을 생각하며 일본을 향한 분노가 커졌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며 민우는 모네의 그림을 닮은 남해바다를 여행합니다.

파독 전시관을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영상으로 보여주는, 민우가 경험하지 못한 그 시절의 우리나라는, 눈물 나는 그들의 힘든 삶이 더해져 오늘의 안락함을 만들었습니다. 민우는 조금 더 열심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일어서던 민우는 선혜의 눈에서 반짝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보았습니다. 다시 시작되는 영상을 보기 위해 의자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민우는 광장으로 나와 시원한 음료를 들고 쏟아지는 햇살을 잠시 피해 의자에 앉았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머뭇거리며 광장을 떠나지 못하던 민우는 전시관 입구를 힐끔거리다 걸음을 옮깁니다. 독일마을에 있는 숙소에 들어온 민우는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왔습니다.

“죄다 맥주, 소시지... 아무리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아픔을 안고 조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던 먹거리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구겨진 마음을 다시 펴고 블로거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으로 들어가 먹음직스러운 독일 소시지와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이곳은 민우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바다의 잔잔함에서 잠시 시선을 돌리다 덜컥하고 걸려 민우를 움찔 거리게 한 선혜의 그림자. 하마터면 민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혜를 뒤쫓을 뻔했습니다.

“그냥.. 따라가볼걸... 아... 지금 내가 뭐라는 거야...”

민우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온몸이 화끈거리며 어지러웠습니다. 일찍 들어간 잠자리에 자꾸만 들어오는 선혜의 뒤 모습이 민우의 잠을 쫓아냅니다. 잠들지 못한 지난밤의 뒤척거림을 침대에 그대로 눕혀두고 민우는 원예예술촌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있는 선혜를 보는 민우. ⓒ최선영

“휠체어가 왜 이렇지?”

선혜는 왼쪽 바퀴에 바람이 빠져있는 휠체어를 힘겹게 끌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너무 무겁지? 미안하구나”

“무겁기는요... 휠체어 바퀴가 바람이 없어서 그렇지...”

가녀린 몸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는 선혜의 양팔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민우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쁜 길을 만들려고 박아놓은 돌길을 지날 때는 덜컹거리며 구르는 바퀴보다 더 흔들리는 선혜의 몸이 몹시도 안쓰러웠습니다.

카페 앞에서 선혜는 잠시 더위를 피하자며 휠체어 방향을 돌렸습니다. 민우도 그들의 뒤를 따라 무작정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카페 안은 이미 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먼저 온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민우는 선혜와 합석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다 대전에서 왔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친근함에 마음을 활짝 연 선혜 아빠는 전설 같은 군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5년 전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퇴근하고 동료들과 가진 회식자리에서 거리로 나온 아빠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날 이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민우에게 절대 술 먹고 핸들을 잡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카페에서 나온 민우는 선혜 대신 아빠의 휠체어를 밀어주었습니다. 한쪽 바퀴에 바람이 빠진 휠체어를 밀고 높고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오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무심히 다니는 길이 이렇게 누구에겐가는 어렵고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 나도 몰랐어요. 두 다리가 건강할 때는... 그런데... 장애인도 실내에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 가꾸어놓은 곳을 가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데 이런 것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것 같아.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선혜만 갔다 오라고 했더니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와 같이 다녀야 한다며 휠체어 대여해준다고 걱정 말라고 해서 들어오긴 했는데... 이렇게...”

“네 오늘 아버님 뵈면서 저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언제든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바람 빠진 휠체어를 대여해주는 것이 참 그렇습니다.”

민우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아닙니다. 선혜 씨한테는 너무 힘든 길입니다. 더군다나 바람까지 빠진 휠체어로는... 제가 함께 할 수 있어서 전 오히려 좋습니다.”

“고맙네요... 신세를 많이 졌으니 식사는 내가 대접하지요.”

선혜도 아빠의 말을 받으며 함께 식사하자며 미소를 보냅니다.

"혼밥할 뻔 했는데... 감사합니다.”

민우는 인사까지 꾸뻑하며 활짝 웃어 보입니다.

“휠체어 바람이 빠져 있었어요.”

“아.. 그래요? 여기 휠체어 바람 빠졌단다.”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고 그제서야 다른 사람에게, 바람이 빠졌었단다라고 말하는 관리자를 보며 먼지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내어준 건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리자에게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그 사람에게 한마디 더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하여 민우와 선혜는 돌아섰습니다.

“바쁜 휴가철이 아니면 조금 더 신경을 썼을까요?”

“아마 장애인은 걷기 힘들고 오르막도 많은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구색 갖추기로 갖다 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선혜야. 변화하는 중이니까.”

“그 변화가 너무 더디고 오래 걸리니까 답답해서 그래요... 전 아빠와 어디든 함께 다니고 싶어요. 예쁜 카페도, 공원도...”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거리 곳곳은 아빠에게는 장애물이 많은 힘든 곳이었습니다. 계단이 없는 가계를 찾아 들어간 곳에서 민우는 살뜰히 아빠를 챙기는 선혜가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최선영

“선혜 씨는 마치 남해바다 같아요.”

“남해 바다?”

“처음 이곳에 와서 잔잔한 바다를 보며 모네의 그림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선혜 씨에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허허, 이거 우리 선혜를 너무 좋게 봐주는구먼...”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아버님, 괜찮으시다면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혼자 온 여행이 홀가분하고 좋을 것 같았는데... 너무 외롭고 힘듭니다. 저 좀 데리고 다녀주세요.”

선혜도 아빠도 듬직하고 진솔해 보이는 민우가 좋았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저 파독 전시관에서 선혜 씨 봤어요.”

“아... 그러셨군요..”

“타인의 아픔... 사실 타인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아픈 역사죠... 그런 아픔을 함께 느끼고 아파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보여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기에는 제 걸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여행은 그 도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을 책에서 보았어요. 남해 독일마을... 이 작은 곳에서 들려주는 커다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어요.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반짝거림이 함께 하는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현재의 눈부심이 그 아픈 과거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았으면 해요... 그게 이곳에서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아닐까요...”

민우는 선혜를 보며 일본행을 접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현재의 반짝임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배려가 이곳에서 더 세심하게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그것이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돈을 위해 관광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민우와 선혜의 이번 여행은 아주 특별한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여행지마다 특별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 특별함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준비되었으면 합니다.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르기 힘든 언덕길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언덕을 오르내릴 수 있는 튼튼한 휠체어만이라도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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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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