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 재판 중인 아돌프 아이히만 ⓒ구글 이미지 검색

2차 세계대전 중 독가스 살포용 살인 기차를 발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 재판에서 자신은 직접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의 재판이라 불렸던 이 재판에 유대인 학살을 피해 망명했던 한나 아렌트가 있었고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원흉은 악한 심성이 아니라 '무지'와 '침묵'이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재판을 지켜본 소감을 남겼다.​

인권수업 중에 듣게 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내용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심오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정의라든지 계급이나 권력 같은 것들에서 오는 인간 본연에 대한 것들이랄까.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저 국가의 존망 앞에 자신은 시키는 대로 국가를 위해 일한 것일 뿐이고 직접적인 살인은 단 한 건도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묻는다.

"나는 공무원이다. 국가의 존망 앞에 당신들은 그러지 않을 텐가?"​

반면 그를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답한다.

"무사유(생각하지 않음)도 죄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는 꽤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는지조차 회의가 들 정도지만 이런 질문 앞에는 아드레날린이 솟는다.

주류 사회가 알게 모르게 배제를 만드는 소수자의 삶을 살면서 사회정의라든지 인권이라든지 인간에 대한 질문들이 철학적이라기보다 피부에 와닿는 현실일 때가 더 많다.​

장애인주차구역에 주차중인 보호자용 차량 ⓒ정민권

지친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한 차를 1시간을 넘게 운전해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뜨악! 집 앞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보였다

못 보던 차다. 방문객일까? 두근두근 주차를 하지 못할 가봐 심장이 요동친다.

얼른 주변을 둘러봤지만 휠체어를 내리고 주차를 할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부리나케 아내에게 SOS를 요청해 아내가 다급하게 주차장으로 내려와 돕는다.

주차된 차량의 마크가 보호자용 흰색이다. 주차는 가능으로 되어있지만 보행 장애인이 탑승이 아니면 주차하면 안 되는 차량. 설사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이 있다 해도 내린 후 이동해 주어야 하는 차량이다.

운전자는 알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주차를 해놔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이동을 요구하지도 않으니 이후에도 그저 무심히 계속 그래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억측일 수도 있고 어쩌다 한번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겠지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어쩌다 한 번이었다는 변명은 핑계다.​

내가 살고 있는 동에는 장애인 주차구역이 딱 한 곳이다. 휠체어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은 그곳뿐이라서 휠체어를 싣고 내려야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운전자의 무심함은 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전에도 이런 차량때문에 멀리 주차한 후 들어가다가 주차장에서 여러 번 낙상을 하기도 했다.

30분 넘게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는다. 심지어 통화 중 신호음 뒤에 바로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는다. 울화가 치밀지만 이동 주차 요청에 관한 정중한 부탁의 문자를 남겼다. 역시 묵묵부답.

여기저기 주차장을 빙빙 돌아도 주차할 곳이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차량 앞에 이중 주차를 하겠다는 문자를 남겼더니 연락이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운전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불쾌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주차를 하면 안 되는 운전자는 불쾌해 하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장애인 차량이 주차를 하는 게 무슨 권리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휠체어로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보행이 불편한 이들은 입구와 먼 곳에 주차를 하고 다니다가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모든 주차구역이 넓게 구획되어 있다면 굳이 장애인 주차구역을 전용으로 만들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소수자의 불편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 그로 인해 그들이 배제되는 삶이 아닌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사유와 부당함에 대한 침묵은 소수자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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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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