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공연장 건물 안에서 보았던 여러 군데의 화장실 어디에도 장애인 화장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옥제

며칠 전,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 하나가 있다. 바로 EBS교육방송에서 방영되는 ‘배워서 남줄랩’. 평소 꼬박꼬박 챙겨보진 않아도 이렇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될 때면 꼭 한 편을 끝까지 시청하는 프로였던지라 어느새 손에 쥔 리모컨을 내려놓은 나의 시선은 곧 TV화면 속에 고정되었다.

10, 20대의 청년 레퍼들과 지식인이 만나 지식과 마음을 나누는 강연 컨셉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이번 회차 초대 게스트는 항간의 베스트셀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저자로 알려진 김원영 변호사. 스마트폰을 활용한 휠체어의 원격조종으로 등장부터 현란했던 그는 방송시간 내내 자칫 무거울 법한 주제인 장애인 이동권의 필요성과 실태에 대해 유쾌하고 쾌활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장애인이동권이라는 말 자체는 정말 한국의 어떤 특수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말인데, 이런 장애인이동권만큼이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또 하나의 권리는 바로 오줌권이에요. …(중략)… 만약 장애인이 외출을 했는데 식당에 갈 수가 없으면 집에서 밥을 많이 먹고 나오면 되지만 화장실 가는 건 그럴수가 없잖아요.”

그 중, 내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었던 이 한마디. 하지만 어디 오줌뿐이랴. TV를 시청하는 내내 격한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노라니 어느덧 내 가슴속 한켠에 묻어둔 지난여름의 씁쓸한 기억 하나가 스물스물 되살아나고 있었다.

학생들의 방학 기간 중에는 덩달아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인권강사라는 직업 특성상, 주어진 시간을 어떤 역량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지난해 여름. 뜻밖의 기회로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진행하는 모니터링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된 직무는 장애인의 올바른 문화 향유권 확립을 위해 기관측에서 제시한 공연장 및 영화관 등의 행사장을 찾아 주어진 항목들에 대한 모니터링 업무를 수행하는 일.

비록 3개월의 단기 업무였지만 모니터링을 위한 각종 문화공연들을 관람하며 바쁜 업무와 일정 탓에 누리지 못했던 문화적 여유를 되찾고, 또 하나의 올바른 인권 확립을 위해 나의 역량을 다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라는 생각이 분노와 슬픔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공연 모니터링 업무가 예정되어 있었던 어느 날. 저녁 여덟 시부터 시작되는 공연은 종료까지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소요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본격적인 공연 관람 전, 늦은 시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변수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공연이 종료된 후 인터뷰를 진행했었던 다른 날과 달리 선(先)인터뷰를 결정. 공연 한 시간 전, 일찌감치 공연장을 방문해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찾아가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공연 관계자분 되시나요? 저는 한국 장애인…….”

“뭐에요? 아직 티켓 오픈 전이에요. 지금 회의해야 하니 이따가 오세요!”

어라? 그런데 이 직원. 인터뷰는커녕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려던 나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매섭게 대화를 단절시킨다. 상황을 보아하니 앞서 한 얘기대로 본격적인 티켓 오픈 전,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숙지하고 있는 듯 보여 말없이 돌아서기를 한참 후, 이윽고 공연 관계자들에게도 조금 한적한 여유가 주어진 것 같아 재시도를 해봐도 상황은 똑같았다.

“바빠요!”

보통의 경우, 이러한 장면이 연출 될 때면 모니터링과 관련한 세밀한 질의응답은 어렵다는 것을 앞선 몇 번의 경험에서 터득했기에 관계자 인터뷰와 관련한 항목들은 과감히 생략한 채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장애인 화장실의 위치가 어디인가요?”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일정도로 드넓었던 건물 안, 도착 직후부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던 장애인 화장실을 찾을 재간이 없어 물었을 뿐인데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놓은 양, 역시 들려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지금 바쁘니까 30분 후에 오세요.”

장애인석은 마련되어 있지만 건물 어디에서도 장애인 화장실은 찾을 수 없었던 공연장의 좌석 배치도. ⓒ이옥제

도대체 명색이 해당 공연장의 직원, 공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관객과의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쁠 일이 무어란 말인가?

무엇보다, 어려운 질문도, 장문도 아닌 화장실의 위치를 안내하는데 왜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황당한 답변에 결국 그 직원을 뒤돌아 해당 건물 안, 몇몇 직원에게 같은 질문을 했지만 야속하리만큼 같은 대답을 듣게 될 뿐이었다.

“저쪽 어디 있을 거예요.”

“다른 데 가서 물어보세요.”

결국 직원들과의 대화를 포기한 채 두 바퀴, 세 바퀴. 직접 발품을 팔아 아무리 돌고 돌아 찾아보아도, 혹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곳이 있었을까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드넓은 공간 어디에도, 관객들의 빠른 배뇨처리를 위해 사방에 있던 그 많은 화장실 어디에도 장애인 화장실은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화려한 볼거리와 웅장한 사운드로 똘똘 뭉친 두 시간의 공연을 보고 난 후에도 내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집으로 귀가하는 늦은 밤, 마치 부글부글 끓는 뱃속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최첨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는 변화의 시대.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장애인 이동권은 이제 단순히 이동을 하는 것만이 아닌 쉬고, 먹고, 싸고, 보고…….

출발지와 목적지 간의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은 물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완벽하게 보장될 때 비로소 완전한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나의 생각이 무리인 걸까?

화려한 건물, 화려한 공연. 그러나 결코 화려하지 못했던, 다녀온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분노와 슬픔으로 잠들어 있는 한 여름의 기억에 씁쓸한 오늘이다.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누군가에겐 사력을 다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씁쓸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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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제 칼럼리스트
현재 장애인권강사 및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인증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 교육강사로서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한 종사자 교육, 장애인 당사자교육 등. 다양한 교육현장을 찾아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평범한 주부의 삶에서 장애인권강사라는 직함을 갖게 된 입문기는 물론,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해 ‘치열함’을 나타내야 하는 우리네 현실 속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장애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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