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은실이’ ⓒ구글

한 케이블TV 채널에서 아주 오래전 드라마 ‘은실이’를 재방영했다. 1998년, 무려 90년대 드라마이니 햇수로 따지면 20년이나 지난 해묵은 드라마지만 그 시절 나도 한창 좋아했던 프로그램이라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관심 있게 챙겨 보았다.

장낙도(이경영) 사장의 극장을 주변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언뜻 영화 ‘시네마 천국’이 연상되기도 해서 ‘시네마 천국’을 좋아하는 내게는 썩 맘에 드는 배경이기도 하다. 또 중장년 세대들에게는 드라마 속에 펼쳐지는 60년대 풍경들이 젊은 날의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며 지난 향수에 열광했듯이 드라마 ‘은실이’의 성공비결 역시 그랬을지 모르겠다.

나도 1998년에 살았을 땐 드라마 ‘은실이’를 아주 재미있게 시청하던 시청자 중 한 사람이다. 구박받는 은실이를 가여워했고 양정팔(성동일)의 빨간 양말과 영숙씨!~를 외치던 그의 우스꽝스런 캐릭터에 까르르했던...

그러나 2018년에 살며 이제 와 다시 보는 드라마 ‘은실이’는 무언가 확연히 달랐다. 드라마야 재방송이니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 드라마를 보는 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그 드라마를 재미있어하던 그 호의는 사라지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울었던 1998년의 나에 대한 약간의 부끄러움이 남았다.

아니, 어떻게 그 시대엔 이런 드라마가 가능했더란 말인가.... 보는 내내 그런 의문이 드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이루 다 손에 꼽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얼핏 따져 봐도 폭력적인 건 말할 수도 없거니와 어떻게 이렇게 여성 비하적이고 차별적인 드라마가 여성 작가에 의해서 쓰여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또 어떻게 이런 드라마가 그 시대에는 최고 시청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며 시청자들의 별다른 저항 없이 끝까지 인기리에 방영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시청률에 한몫했던 시청자 중에 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 민망할 정도...

드라마 ‘은실이’의 정팔이와 춘식이 ⓒ구글

생각나는 대로 한 두 장면을 꼽아 보자면...

만취한 김 간호사를 (드라마 속에서 양정팔이 짝사랑하는 여인이다) 여관에 눕혀 놓고 그냥 나온 양정팔을 친구 춘식이(정웅인)가 답답한 듯 나무라며 이렇게 말한다.

“바보같이 그걸 그냥 나오면 어떡해!

여자가 남자 앞에서 취했을 때는 남자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야”...

그뿐인가. 양정팔이 사랑하는 여인 김 간호사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할 때 양정팔이 애인을 뺏기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친구 춘식이가 김 간호사를 납치, 감금하며 다른 남자와 만나지 말 것을 종용하고 협박하는 장면까지... 그러나 이런 장면은 그저 멋진 ‘의리’로 포장됐다.

그리고 한 남자의 순정을 끝내 몰라주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는 김 간호사는 나쁜 여자처럼 그려졌다. 심각한 데이트 폭력이며 스토킹일 수 있는 장면들이 ‘남자의 순정’으로 미화될 뿐만 아니라 여성은 그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의 증거로 그려졌다. 여성의 No!는 그냥 거부가 아니라 앙탈 섞인 Yes일 뿐이라는 남자들의 신념에 확신을 제공하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건 의리도 순정도 아닌, 그저 폭력일 뿐이며 싫다는 여성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하는 모든 폭력적 행위는 ‘박력’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멋 있는 터프함도 아닌 그냥 ‘찌질한 스토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성을 대상화‧상품화하고 비하하는, 심지어 혐오적이기까지 한 수많은 생각과 장면들이 무의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과연 이 시대에 ‘은실이’ 같은 드라마가 허용될 수 있을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나이 어린 여자와 나이 든 남자라는 설정만으로도 제작 단계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 모든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상영된 드라마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마칠 수 있었지만 드라마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전에 비해 훨씬 성장해 있는 이 시대에 ‘은실이’ 같은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아마 몇 회 이어지기도 전에 게시판에 비난이 폭주해서 드라마의 방향 자체를 수정하거나 조기 종영하는 사태가 빚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20년 전에는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20년 후인 요즘은 하기 어려워졌다. 설령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하는 만용을 부려보더라도 뜨거운 비난과 비판의 폭주로 더 이상의 지속이 가능하지 못할지 모른다. 나는 이 시대가 적어도 그쯤은 왔다고 믿는다.

이런 변화는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여러 가지 필터들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군사독재시대를 넘어, 경쟁과 경제성장만 우선하던 과열성장의 시대를 넘어, 촛불의 시대를 넘어오면서 우리 안에 자란 민주의식, 그리고 다름과 소통을 지향하는 다양성의 시대의식, 다수의 그늘에 갇힌 사회적 소수를 향하는 연대의식,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페미니즘의식, 인권의식... 이런 의식과 개념의 필터들이 섬세하고 다양하게 작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만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마치 다양한 용도의 필터들을 내장해서 맑고 깨끗한 물을 걸러내는 정수기처럼 말이다.

‘장애학’이라는 것도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필터가 되지 않을까. 여성주의나 민주주의 인권의식... 이런 필터들로 미처 걸러내지 못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차마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가지지 않는 장애에 대한 많은 부정확하고 불의한 의식들을 또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고 걸러내는 필터, 거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라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필터...

그런 새로운 필터를 끼우고 보는 세상은 얼마나 달리 보일까.

그래서 또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그 기대가 적어도 나에게는 장애학을 기꺼이 선택하게 하는 이유가 됐다.

장애학과 신입생 모집 ⓒ대구대학교

20년 전에 흥행하던 ‘은실이’가 20년 후엔 시대의 부끄러운 흔적으로 인식되듯이 장애학이란 필터도 먼 훗날엔 분명하게 시대를 나누는 새로운 시대의 관점과 변화를 만들어 주지는 않을지...

올해 국내 최초로 ‘장애학’을 개설한 대구대학교가 새로운 대학원 신입생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이다.

장애학도로서의 사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장애학’이란 새로운 필터에 관심과 흥미를 가져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이다.

많은 이들이 장착하고 발휘하는 필터는 더 큰 변화를 빨리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어린 기대가 이번 칼럼을 쓰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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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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