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구글

백설공주는 왜 하필 왕자와 결혼했을까? 곁에 일곱 명이나 되는 친절하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두고 말이지.

1812년 그림형제가《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Kinder-und Hausmärchen)》에 맨처음 백설공주 이야기를 내놓을 때는 '백설공주(Schneewittchen)'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가 1857년 최종판에서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Schneewittchen und die sieben Zwerge)’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제목을 이렇게 바꿀 때에는 일곱 난쟁이라는 캐릭터들이 주연급으로 비중이 커져서일 텐데 여전히 그들은 비중 없는 조연급으로 취급된다는 생각에 독자로서 내가 다 억울할 지경이다.

일단, 제목의 ‘일곱 난쟁이’라는 표현이 좀 거슬리니 이하 ‘일곱 명의 키 작은 사람들’로 표현부터 바꾸고... 제목대로만 보자면 백설공주와 일곱 키 작은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사실 왕자는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었을 때 우연히 지나다 뜬금없이 나타난 소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백설공주는 그 갑툭튀 캐릭터와 결혼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피 엔딩’이라고 말한다. 과연 정말 해피 엔딩인가?

백설공주는 왜 왕자를 선택했을까? 왕자가 죽은 백설공주의 생명을 구해줘서...? 그렇게 따지면 일곱 남자들 만큼 백설공주를 때때마다 구해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왕비의 집요한 살해시도로부터 매번 공주를 구한 건 바로 그 일곱 사람들이다.

그런데 왕자는 겨우 딱 한 번, 그것도 공주가 다 죽은 다음에야 뒤늦게 나타나, 게다가 공주를 살리겠다는 불굴의 의지 한 번 보인 적도 없이 그냥 공주 얼굴 하나 보고 대뜸 이뻐서 데려가다가 우연히 살아난 것뿐이다.

그런데 또 깨어난 공주는 어떻게 했나? 깨어나서는 그간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했던 일곱 남자를 미련 없이 버려두고 홀랑 왕자를 따라가 버린다.

백설공주가 왕비의 손아귀를 피해 찾아든 숲속에서 그녀를 받아주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사람들은 바로 일곱 남자들이다.

얼굴 같지 않게 좀 멍청한 백설공주가 매번 왕비의 계략에 맹하게 넘어갈 때마다 그녀를 구해준 것 역시 그 일곱 남자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 중 누구도 백설공주의 로맨스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왜 그것이 당연한가.

디즈니 만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구글

숲속에서 일곱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백설공주의 애니메이션 삽화를 보면 이런 식이다.

나이도 어린 공주가, 그것도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에 그림처럼 저렇게 허리에 팔을 두르고 서서 일곱 남자들을 내려다 보며 무어라 지시를 하고 있다.

이 무슨 주객전도인가.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키가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들을 상대로 군림하며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죽다 살아난 뒤에 보인 공주의 행태는 어떤가. 깨어나 보니 눈 앞에 왕자가 있었다. 책엔 구체적으로 왕자가 잘 생겼다고 언급되지 않았으니 정말 잘 생겼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왕자가 잘 생겼다고 단정하고 잘 생긴 왕자를 따라가는 백설공주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백설공주의 선택은 왜 의심의 여지도 없이 당연한가.

잘 생긴 왕자라서...? 아님, 왕자라는 신분과 재산 때문에...?

그 어떤 관계의 상호작용도 없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왕자와 덜컥 결혼해 버리는 백설공주는 여성주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

‘뭐 얼굴 뜯어 먹고 살래?’...

어른들 말대로 보더라도 참 철없는 선택 아닌가. 그런데도 왕자를 따라가는 공주라니...

동화를 읽는 사람들 중 왜 공주가 왕자를 선택해서 가 버리는지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마치 왕자를 선택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반응. 아무도 그 일곱 명의 남자를 남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냥 난쟁이일 뿐... 심지어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라는 이야기로도 각색이 되기도 했지만 역시 공주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소위 난쟁이라 불리는 그 일곱 키 작은 남자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남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여기에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내재되고, 일반화된 시각이 드러나는 건 아닐까. 장애인은 장애인일 뿐, 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 뇌병변 장애인 남성이 지하철에서 겪은 황당한 얘기를 들으며 참 기막혔던 적이 있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한 남성이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기어코 따라오더니 마치 묻지 않으면 안 되는 필사의 질문이기라도 하듯 “저... 당신도 남자구실 할 수 있어요?” 라고 묻더라는... 그뿐이겠나? 많은 장애여성이 무성의 존재인 듯 취급받으며 심심치 않게 성과 관련한 질문을 받는다. 매달 그거 해요? 애는 낳을 수 있어요? 여자구실은 해요? 등등...

배우 '피터 딘클리지' ⓒ구글

세계적으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 ‘피터 딘클리지’ 역시 키 작은 사람이다. 영화 ‘헝거게임’ 등 다양한 작품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 줘서 많은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사는 다른 멋진 남자배우들 앞에 붙는 ‘멋진 남자’를 표현하는 다양하고 일반적인 수사가 아니다.

동화 속 일곱 남자들에게 붙은 똑같은 말 ‘난쟁이’이란 말이 그 앞에 붙은 가장 많은 수사다. 그를 멋진 남자배우로 보는 시각보다 개성있는(?) 장애인 배우 정도로만 보는 시각이 더 일반적인 듯하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영화 ‘쓰리 빌보드’에도 그가 출연하는데 범죄로 딸을 잃은 억울하고 불쌍한 엄마 밀드레드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도와주지만 밀드레드는 그를 경멸하고 이용한다. 왜 피터 딘클리지는 멋진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없는가?

누군가 페이스북에 한탄을 했다.

비 오는 날 자기도 제임스 딘처럼 멋지게 빗속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그러면 제임스 딘처럼 멋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 비 맞고 다닌다고 불쌍하다고 동전을 던져 주겠지? 라고...

그 짧은 글에 피식 웃었지만 많은 장애인들의 현실이 그렇다. 뭘 해도 불쌍해 보이거나 ‘개성 있는’과 같은 류의 중성적인 수사로 얼버무려 표현되는...

장애인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성적인 존재다. 남자로서 멋지고 싶고 여자로서 아름답고 싶은, 충분히 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싶은 성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이렇게 동화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회적 의식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장애인은 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만약, 백설공주가 선택하는 사람이 철딱서니 없는 외모지상주의자 왕자가 아니라 곁에서 오랜동안 그녀를 지켜준 키 작은 남자들 중 하나였다면, 그리고 그 키 작은 남자들이 가진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동화 속에서 뿜뿜 마구 뿜어져 나오도록 표현했다면 독자들은 지금보다 좀 더 깊이 있게 세상을 보지 않을까.

우리 곁에 동화, 우리 안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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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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