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보고 있는 선미 ⓒ최선영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

“어디서 봤더라?”

선미는 눈에 들어온 낯익은 얼굴에, 걸음이 잡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선미의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선미와 눈을 맞춥니다.

“맞아, 그 사람.”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그를 만났던 곳이 떠올랐습니다.

“생각났어?”

은영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집니다.

“저 사람, 우리가 보러 갔던 연극에 나온 배우잖아.”

“아.. 맞네.”

선미의 말에 은영도 생각났다는 듯 미소를 보입니다.

3년 전 겨울, 하얀 눈을 가득 끌어안은 하늘은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잿빛 미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갔다가 눈이라도 오면 힘들 텐데......”

“하늘 봐. 눈 올 날씨는 아니야.”

선미는 은영의 말이 불안했지만 연극을 보겠다는 마음이 그 불안함보다 더 커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들의 걸음은 연극에 대한 기대로 가벼웠습니다.

소극장 정도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들의 잡티까지 다 보일 정도로 무대와의 거리는 가까웠고 옆 사람의 숨소리가 배우의 대사보다 더 크게 들릴 만큼 자그마한 공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의자도 없었습니다.

“이런 곳일 줄은 몰랐어..”

은영이 미안한 듯 선미를 보며 표정을 찌푸립니다.

“괜찮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공간이라고 미리 포스터에 나와있었잖아. 그럼에도 스토리가 마음에 들어서 온 거고. 바닥에 앉는 건 좀 힘드니까 그냥 서서 볼래.”

“괜찮겠어?”

“응, 시간이 길지 않잖아.”

선미는 은영이 미안해할까 봐 더 괜찮은 척했습니다.

“저...... 여기 앉으세요.”

곱상하게 생긴 그가 의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 괜찮은데..”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니까 앉으세요.”

“우~와. 저희도 의자 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미소를 보내며 의자를 달라고도 하고 그냥 앉으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보겠어요.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네요. 저만 의자에 앉아서......”

선미는 그가 준비해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선미가 의자에 앉는 걸 보고 그는 무대 뒤 컴컴한 커튼 뒤로 몸을 숨깁니다.

“저 사람 너무 잘 생겼다.”

은영은 선미 무릎을 톡톡 건드리며 실눈을 뜨고 웃었습니다.

연극이 시작되었고 첫 등장부터 흥미진진한 전개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관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사 하나하나를 받아들었습니다.

관객과 호흡을 나누는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익숙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오래된 친구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래서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나 봐.”

“그러게. 정말 색다른 느낌, 편안한 분위기, 식구 많은 이웃집에 놀러 온 것 같아. 너무 좋다."

선미와 은영이 소곤거리는 틈에 또 다른 배우가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와~”하는 소리에 선미와 은영도 무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무대 위에 있는 그 ⓒ최선영

“어~ 저 사람.”

선미에게 의자를 건네던 그였습니다.

“스텝인 줄 알았는데 배우였구나.”

은영은 그를 보며 속닥였습니다.

“저 스텝 맞습니다. 오늘 배우가 펑크 내는 바람에 이렇게 졸지에 무대에 올라왔어요.”

은영의 소곤거림에 답하는 그의 말에 객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미도 은영도 그 바다에 풍덩 빠져 한참을 웃었습니다.

짧은 연극은 긴 여운을 남기고 끝이 났고 그렇게 그들은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밖은 펑펑 첫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헉, 어떻게”

“길이 많이 미끄러워졌어. 큰일이네.”

“택시가 잘 오지 않는 길인데...... 한참 걸어가야 될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은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선미에게 미안해했습니다.

“괜찮아. 덕분에 좋은 연극 봤잖아. 기다리면 오겠지.”

택시는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미 앞에 차 한 대가 서더니 그가 차에서 내립니다.

그날 선미는 그의 차를 타고 집까지 왔습니다.

즐거운 기억 속에 배려 깊은 한 사람으로 남아있던 그가 선미의 눈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도 선미를 알아본 듯, 옅은 미소를 보이며 살짝 눈인사를 건넵니다.

잊고 있던 행복한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순간입니다.

잠시 나눈 눈인사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제 길을 갑니다.

빠른 시계 초침의 움직임에 또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도 다시 희미해졌습니다.

은영이 호주로 3년간 인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 하던 선미와 은영은 서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맛집 검색을 하고 3박 4일 동안 삼시 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겠다는 단순한 계획을 세운 그들이 첫날 찾아 간 맛 집부터 덜컥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검색할 때 좀 잘 알아보지.”

“음식점 앞에 이렇게 계단이 많을지 누가 알았겠냐고.”

“할 수 없지. 그냥 올라가자. 맛있는 점심을 위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

클러치를 짚고 계단 앞에 서 있는 선미 옆으로 휠체어를 탄 남자가 다가옵니다.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난감한 표정으로 계단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도 검색해서 왔나 보다.”

“그러게. 장애인들은 맛 집도 잘 보고 다녀야 해.”

“어-”

“왜?”

“저 사람..”

은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본 선미도 눈이 커집니다.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가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휠체어를 계단 위로 올려주겠다며 말을 건넵니다.

휠체어 탄 남자가 미안했는지 괜찮다고 했지만 이왕 온 거 맛이나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저 사람은 하는 짓마다 기특하다.”

은영의 말에 선미도 미소가 나옵니다.

“우리도 올라가 볼까?”

은영의 말에 선미도 클러치를 짚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저......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가 선미 앞에 서있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천천히 올라가면 돼요.”

선미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괜찮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제가 업어드리고 싶은데 불편하시겠죠?”

“아니, 좀 업어주세요. M.T 갔을 때도 과 친구들이 업어준걸요.”

은영은 선미의 클러치를 뺏어들고는 그의 등에 선미를 밀었습니다.

선미는 은영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친절을 더 이상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등에 업힌 선미 ⓒ최선영

“고맙습니다.”

“아뇨, 너무 가벼우셔서 힘들지 않고 기분만 좋았습니다. 이렇게 예쁜 분을 제 등에 없는 행운을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같은 공간 다른 자리에 앉아 그들은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맛 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정말 그 맛은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누구나 편안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인테리어 효과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으신 계단이 장애인분들이 오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불편함 없이 많은 분들이 이 맛을 즐기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렇게 주제넘게 몇 마디 드립니다.”

계산을 하는 그가 주인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선미와 은영은 그가 더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는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고도 계단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휠체어를 탄 남자와 선미를 기다린 것입니다.

“요즘도 연극 스텝으로 일하시나요? 그때 이후로 파랑새 연극 소식이 없어서......”

“그때 두 분 오신 무대가 저희 고별무대였습니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이제야 군대를 간다고 했습니다. 입대 전 친구들과 이별여행.

“어~저희도 지금 이별여행 중인데...... 이 친구가 호주로 가게 되었거든요.”

선미와 은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일행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3박 4일 동안 함께 하며 남다른 그의 배려에 선미는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장애물이 참 많아요. 복지국가라고 말하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외치지만 이렇게 생활 곳곳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페든 식당이든 영화관이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어디를 가든 턱과 계단이라는 장애물을 만나게 되니까 불편한 것이 아주 많을 것 같아요. 선거 때마다 장애인을 위한 공약들을 내놓는데 선거 끝나고 나면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신 분들은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네요.”

“네 정말 좋은 말씀이에요. 저도 선미와 함께 다니면서 그 불편함을 피부로 느끼고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사자인 선미는 얼마나 더 아쉬운 게 많을지...”

“사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건 비장애인 시선에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앞으로 더 개선되리라는 기대로 투표도 하고 왔어요. 좋아지겠지요.”

깊어가는 밤, 별빛의 반짝거림이 그들의 시간을 밝혀줍니다.

아쉬운 여행을 마치고 은영은 호주, 그는 군대로 갔습니다.

“잘 지냈어요?”

“네. 더 씩씩한 모습이라 보기 좋아요.”

“전...... 선미 씨 많이 보고 싶었는데..”

휴가를 나 온 그는 선미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전합니다.

“같은 마음 아닐까요? 그러니까 지금 승원 씨 앞에 이렇게 있는 거고.”

선미도 그에게 설레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제대하는 날짜는 가까워지고 서로를 향한 그들의 마음은 더 깊어졌습니다.

승원의 제대와 은영의 귀국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너 아직 올 때 안됐잖아.”

“응... 그게, 좀 일찍 왔어.”

선미가 승원과 사랑을 키우는 시간 은영은 여행에서 만난 승원의 친구 형욱과 사랑을 만들어냈답니다.

“너네들~ 정말, 대단하다. 말도 없이 어떻게.”

“하하, 내가 호주에 세 번 갔었어.”

형욱의 말에 승원은 배신감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달랑 세 번 만나고 사랑?"

"만난 건 세 번이지만 매일 영상통화로 데이트했어. 전화비를 감당 못하겠기에 들어왔지."

은영의 말에 선미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습니다.

함께 여행했던 승원의 다른 친구들도 그들을 부러워하며 했습니다.

“다시 해보자.”

승원의 제안에 그의 친구들은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합니다.

“사실 파랑새 마지막 무대에 선미가 왔을 때 너무 생각이 짧았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어.

장애인을 위한 배려 없이 객석을 준비한 것에 대한 생각이 늘 남아있었어. 함께 마주칠 기회가 없었을 때는 어떤 게 불편한 건지도 몰랐던 게 사실이고. 모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도 많을 거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배려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한 연극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틈틈이 모여 연습하고 파랑새가 보여주었던 그 편안함과 특별함을 그대로 간직한 그들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을 준비합니다.

미소 짓고 있는 선미와 승원 ⓒ최선영

그 연극의 시작은 선미와 승원의 결혼식으로 막을 올리려고 합니다.

스치는 몇 번의 인연이 운명이 된 그들의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됩니다.

아름다운 그들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누구나 불편함 없이 거리 곳곳을 다닐 수 있는 장애물 없는 세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이번 선거에도 그 변화를 기대하며 투표를 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