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는 아시다시피 프랑스 작가 셍텍쥐페리가 1943년에 발표한 동화다. 그는 1차,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비행조종사다. 전쟁은 세상을 황폐화시켰고 고통과 상처에 신음하게 하였다. 실제로 작가는 1935년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존재를 위해 싸우지만 인간은 개인적 관계를 초월하여 서로 사랑하고 맺어가는 정신적 유대가 진정한 삶이라고 그는 전쟁을 통해 느꼈다. 그 어른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함도 말해주고 싶었다.

‘어린왕자’에 장애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정의한 불완전한 기준이다. ‘장애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장애’라는 말이 없어지고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러면 ‘어린왕자’에 장애인이 보인다.

여러 문학 작품에 ‘장애인’을 ‘어린왕자’에 비유한다.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이라는 류승연 장애부모의 이야기는 발달장애 아들을 ‘어린왕자’라고 하고 있다. 낯설고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장애’, 고쳐야 할 병으로 보았던 ‘장애’에 대한 편견, 자녀 자신의 꿈이 아닌 엄마의 꿈을 강요한 욕심, 세상의 차가운 시선, 아들의 신호를 부적응 행동으로 보았던 오해 등은 장애인과 ‘어린왕자’가 동일시된다.

장애인은 먼 우주에서 온 별난 존재 같지만, 지구의 생활양식을 천천히 습득해나가는 속도가 다른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초등부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한 청각장애인 이덕희 군에게 한 언론사에서는 ‘소리 없는 코트의 어린왕자’라고 하였다. 꿈과 다름(기사는 다름을 틀림과는 구별하였지만 별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승리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인간승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사지가 없이 태어났다. 신체가 달라 불만족이라 하였으나 그 불만족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다.

신체는 개성이며, 신체에 대한 편견은 삶에 대한 편견이 될 수 있다. 신체는 불만족, 그러나 인생은 대만족을 위해 그는 편견과 정면으로 맞섰으며, 생명의 거리에 장애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다름과 사회적 편견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그는 ‘어린왕자’인 셈이다. 어떤 평론에서는 ‘어린왕자’를 장애인의 새로운 이름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어린왕자’가 주는 교훈을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어린 시절의 창의성을 살려야 한다. 모자를 보고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모습이라고 한다. 이런 비논리적 사고를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장애인도 그런 눈으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고, 굳이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둘째,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단 하나도 가지지 못했으면서 세상의 모든 별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인은 늘 외롭고 단조롭다. 별은 소유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장애인이 얼마나 능력을 발휘하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아름다운 것이다.

셋째, 1분마다 가로등을 켜고 꺼야 하기에 조금의 여유도 없는 어느 행성의 점등인을 비유하면서 인간은 너무 여유가 없고 자신을 위해 무언가 즐길 시간도 없다. 즐기는 것은 작은 것에도 소중함을 알고 감사함을 아는 것이다. 장애인의 삶도 자기결정과 의지에 의해 즐겨야 하는 인생이다.

넷째, 책상 앞에 갇혀서 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지리학자를 이야기하면서 세상과 교류하고 여행하며 경험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장애인도 세상과 소통하고 자립생활을 통해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섯째, 자신의 선택은 삶을 존엄하게 만든다. 시간을 사용하고 정을 들인 것은 다른 것들과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도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고, 자기별의 장미도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치관과 의미부여, 자아존중감, 자기결정권 등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물이 있어서란다. 우물을 보니 모래의 반짝임이 달리 보였다고 한다. 이 우물은 꿈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꿈으로 해석하면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동력이라는 것이고, 사랑으로 해석하면 계속 물을 퍼 올리듯 사랑을 사용해야 새로운 사랑으로 다시 채워진다.

동화 ‘어린왕자’에는 각종 편견이 서술된다. 그가 찾아간 별들은 모두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권위적이고 높임받기를 원하는 왕, 군림은 장애인에게 억압이다. 자기의 칭찬 외에는 관심이 없는 허영쟁이, 장애인보다 우월하다거나 동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선이다.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술꾼, 허무주의로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삶은 극복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5억 개의 별을 자기 것이라며 세고만 있는 상인, 물질적 가치로 능력 위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1분마다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은 누군가에게 유익한 일은 한다고 믿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기계적 행동은 의미가 없다.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이론 속에 갇힌 학자, 장애 인식 개선이 머리로만 되었고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하며 말로만 떠든다.

‘어린왕자’가 왜 다른 별이 아닌 지구에서 영리한 여우를 만나고 작가를 만났을까? 지구는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희망이다. 여우는 말한다.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이는 장애 그 자체를 보지 말고 사람을 보라는 말이다. “장미가 소중한 것은 그를 위해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 이는 손잡고 관심을 가지면 모두가 소중해진다는 말이다.

‘어린왕자’가 사랑하고 있는 장미도 장애인이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바오밥나무가 자라면 별이 쪼개어질 수 있어 싹을 뽑아 버리는데, 장미를 발견하고 물을 주고 키우게 된다.

그런데 자존심이 강한 장미는 춥다, 덥다, 목마르다 등등 매우 성가시게 한다. 심지어 거짓말도 한다. 그러나 보호가 필요하다. 그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어린왕자’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 장미를 떠나 여행을 선택한다.

장미는 스스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왕자가 필요하다. 그 욕구를 자존심으로 여겼다. 장애인도 자존심으로 산다. 그리고 사회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장미를 사랑한 왕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장애인 인식 개선 역시 사회적 책임이다.

‘어린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 웃고 있으면 그 별을 바라보는 작가는 모든 별이 웃는 것으로 보일 것이며, 그것으로 친구가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자 그림을 양을 그린 그림 대신 그려주자 그 안에 양이 있다고 하는 왕자, 굴레를 덮어 보호해야 하는 장미에게 그 굴레는 끈을 그리지 않아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는 완전할 수 없으며, 끊임없는 무한한 발전을 요구한다.

‘어린왕자’는 무거운 껍질처럼 몸을 버리고 정신만으로 자기 별로 돌아간다. 몸은 벗어야 할 하나의 옷에 불과하다. 장애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바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어린왕자’는 이제 더 이상 장애인이란 말이 필요 없다.

오래된 고정관념은 바로 어른의 강요된 숫자와 편견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어린이의 편견 없는 순수한 눈으로 서로 친구로 통하게 되는 사건, 독특한 욕구의 까다로움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였으나,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 서로 길들이며 사랑하듯이 선택이 사랑임을 발견하고 책임지기 위해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 아름다운 별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바라보면 대낮인들 그 별이 보이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왜 밤에야 알 수 있는가?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바로 편견인 것이다.

소설가 조세희는 ‘어린왕자’를 통해 이웃의 무관심함을 다시 비판하고 있다.

이것을 장애에 적용하여 해석하면 장애인에게 아무것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권침해이며, 인식 개선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우리도 시간여행을 해 보자. 우리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만이 누구나 어린이였던 적이 있으면서 망각해 버려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갇혀 굳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 인식 개선, 그것은 강은교 시인이 말하는 ‘불로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물로 서로 만나는 것’이다. 불은 서로를 태우고 사라지지만, 물은 서로 같은 길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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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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