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빌라가 문을 열었을 때, 학생이 12명이었습니다. 학생 4명에 특수교사 1명을 시설에 파견하여 특수학급을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12명이면 특수교사 3명이 파견되고, 3학급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특수학급을 편성하도록 권유받았지만, 월평빌라는 학생들을 일반학교에 다니게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불편하고 수고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고,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증의 장애가 있는 12명을 학교에 보내려면 분주했습니다. 세수하고 채비하는 수고가 대단했습니다. 씻고 입고 먹는 것을 일일이 도와야 했고, 초·중·고 6개 학교에 등교해야 했습니다. 그 수고와 비용을 학생과 직원이 감당해야 했죠.

시설 안에 특수학급을 두면 좀 낫겠죠. 채비하는 것이야 비슷해도 학교 오가는 길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겁니다. 휠체어에서 차로, 다시 차에서 휠체어로 옮겨 타는 수고 대신 3층 집에서 2층 학급으로 가면 그만일 테니까요. 그만큼 비용과 시간도 줄겠고요.

학교 다니면 교통사고를 당하고 길을 잃고,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니 불안하고 위험하다며 시설에 학급을 편성하라고 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12명이 학교 다니며 이런저런 사고를 겪었습니다. 여러 달 노력한 끝에 혼자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날 길을 잃어 찾아 나섰고,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입어서 조치했고, 학교행사에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었습니다.

수고, 비용, 시간, 위험, 불안을 이유로 시설에 특수학급을 만들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있으라, 가만있으라 합니다. 학생, 부모, 직원, 학교, 사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권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 그 이유가 분명해야 12명을 6개 학교에 보내는 발걸음이 당당하고 가벼울 같아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학생이 학교 다니는 데는 학생, 가정, 학교, 사회가 얼마쯤 수고·비용·불안·위험을 감당합니다. 누구라도 감당하며 학교에 다녔고, 감당하며 학교에 보냅니다. 장애 비장애 구분할 게 아니었습니다. 시설에 살든 어디에 살든 구분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그것을 감당하며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조금 더 들여다봤습니다. ‘더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더 많은 수고와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불안과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겁니다. 수식어 ‘더 많은’이 시설에서 공부하라는 배경이 되는 거죠. 그럴까요?

‘더 많은’ 수고와 비용과 불안과 위험이 있다면,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고, ‘더 많은’ 비용을 들이고,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학교 다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시설에 특수학급을 편성하라는 다른 배경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시설에 사는 학생은 시설 내 특수학급에서 공부하는 것을 당연시한 것이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학교생활은 글을 배우고 수를 깨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는 처음 접하는 사회로써 관계를 배우고 관계를 쌓고 질서를 배우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공부에 앞서 추억을 떠올리는 게 아닐까요?

교실을 누비며 뛰놀던 시절과 친구들, 소풍 운동회 학예회의 추억, 쉬는 시간과 방과 후에 운동장을 누비며 흙먼지 날리던 풍경을 어른이 되어서도 추억하고, 인생의 큰 자산으로 삼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 사장님에게 ‘달고나’를 배웠고, 통학버스 안에서 훔쳐보던 여학생에게 사랑을 배웠습니다.

4월 초, 봄날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전날 내린 비와 추위가 빙판길을 만들었고, 휠체어에 앉아 눈을 맞으며 학교에 갔습니다. 이렇듯 학교 오가는 길에 맞는 비와 바람과 햇살조차도 학교생활에서 얻고 누려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시설 내 특수학급을 다니라는 건 공부가 학교생활의 전부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공부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지만, 학교생활은 매우 다양합니다.

학교생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떨까요? 영화를 본다는 건 영상과 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영상과 소리가 영화의 기본 요소이지만 영화를 본다는 건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어느 영화는 여성들이 꼭 봐야할 ‘힐링 영화’라고 홍보합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담은 한 영화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마치 정치에 참여하는 행동 같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연인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누구나 가슴에 담은 한 편의 인생 영화가 있고, 영화 속 대사가 용기를 주고 희망을 품게 합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상과 소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집에 머무르라 합니다. 가만있으라 합니다. 시설 입주자를 사람으로 본다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학교 다니며 작은 사회를 마주하고 질서를 배우고 관계를 쌓게 해야 합니다.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들이고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죠. 학교생활이 공부에 그치지 않고, 영화를 본다는 게 영상과 소리에 머물지 않는다면, 부모형제 친구 이웃 동료 회원과 더불어 살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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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현 칼럼리스트 ‘월평빌라’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줄곧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사회사업가가 일하는 이야기, 장애인거주시설 입주 장애인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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