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를 보고 있는 재민 ⓒ최선영

재민이 희수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희수가 4학년 때입니다.

친구 소민의 집에서 그의 여동생 소연의 친구 희수를 만났습니다.

몇 달을 이름만 듣다 처음 얼굴을 본 날입니다.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고 눈코 입을 그리고 지우다를 반복하며 희수의 얼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눈코 입을 제대로 그려 넣었던 날을 재민은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의 설렘을.

초등학교 6학년 그날 이후 재민의 눈에는 늘 희수가 보였습니다. 재민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그녀를 재민은 길을 가다 먼발치에서 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이제 숙녀가 된 희수를 재민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수가 온다는 말에 가지 않고 몇 시간을 책을 펼쳐놓고 희수를 기다립니다.

재민을 보는 희수 ⓒ최선영

희수가 재민을 처음 본건 대학 2학년, 소연의 집에서였습니다.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을 한 재민은 소연의 오빠 소민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희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희수는 좋았습니다. 다르게 보지 않는 느낌.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도, 휴가를 나와서도 재민은 희수의 집 앞을 찾아가 희수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희수 앞에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재민이 몇 번이나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소연의 말에 희수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희수도 그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앞에 나서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러지 못하는 그를 보며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아 그를 향한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없는 거야. 나랑 만나면 어떨지 아니까.”

“그건 아닐 거야.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신중하고 조금 소심하기도 해서 그럴 거야.”

“어쨌든 그런 용기도 없으면서 나를 좋아할 수 있겠어?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싫어.”

인연이 아닌 스치는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희수가 대학을 졸업한 봄입니다.

거리마다 봄꽃의 미소가 가득 퍼지는 아름다운 계절에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희수를 향한 설렘을 안은 재민과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을 들고 있는 희수가 마주 서 있습니다.

희수와 재민 ⓒ최선영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용기 없는 재민이 아닙니다.

그는 남자가 되어 희수 앞에 나타났습니다.

“희수 씨, 많이 기다렸습니다.”

“뭘요?”

“희수 씨 앞에 설 수 있는 이날을. 군대도 가야 했고, 졸업도 해야 했고. 취직도 해야 했으니까요. 희수 씨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될 때 시작하고 싶어서 제가 오래 기다렸습니다. 남자친구 없죠? 소연이에게 혹시라도 남자친구 비슷한 게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알려달라고 했었어요. 그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나서보려고.“

재민의 뜻밖에 말에 희수는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저......”

“아무 말하지 마세요. 지금은.”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봅니다.

“희수야 오늘 재민 오빠 만났지?”

“응”

“어때?”

“뭐가?”

“아니, 너도 재민 오빠 보고 조금 괜찮아했었잖아. 용기가 없어서 뭐 어쩌고 하면서 네가 마음 접어버린 거지.”

“잘 모르겠어.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좀 낯설었어. 그때랑 느낌이 달라서.”

“그 오빠 성격 원래 안 그런데 엄청 용기 낸 거야. 그런 성격 네가 싫어한다고 했어.”

다음날, 재민이 희수를 기다립니다.

“어머, 아침부터...”

“오늘부터 제가 출퇴근 시켜드릴게요. 괜찮으시죠? 늦었어요 얼른가요.”

멀뚱히 바라보는 희수의 손을 잡아끌며 차에 태웁니다.

“왜 제가 좋은 거죠?”

한참을 말없이 앞만 보던 희수가 말을 꺼냅니다.

“좋아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그냥......, 그냥 좋았어요. 그냥.”

재민은 살짝 고개를 돌려 희수를 봅니다.

“저녁에 시간 되세요? 할 말 있어요.”

“없어도 내야죠. 그런데 할 말 있다니까 좀 겁이 나기도 하네요.”

희수는 알 수 없는 눈빛을 재민에게 남기고 회사로 들어갑니다.

“일찍 오셨네요.”

퇴근 후 그들이 함께 간 곳은 초콜릿 카페.

소연을 통해 희수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희수와 늘 오고 싶었던 곳입니다.

재민은 희수에게 안개꽃을 건네줍니다.

안개꽃을 건내는 재민 ⓒ최선영

“희수 씨 닮아서...”

“감사합니다.. 저..”

“우선 주문부터 하죠.”

재민은 희수의 말을 가로막으며 주문을 합니다.

“무슨 말하려는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는 게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거예요.”

“네.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말을 하다 희수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재민은 말없이 희수를 기다려줍니다.

“저.. 대학 3학년 때 복학한 선배랑 잠깐 사귄 적 있어요. 소연이도 몰랐을 거예요. 세상을 다 줄 것처럼,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함께 할 것처럼 많이 좋아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100일을 기념하던 날 길을 걷다 그 사람 형이랑 마주쳤어요. 당황하며 잡고 있던 제 손을 놓더라고요. 학교 후배라고 소개하는 그를 보며 내가 가진 장애를 그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걸 알았어요. 다시는 연애 같은 거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왜 그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야 하죠? 지금 여기는 희수 씨랑 내가 만나는 자리인데.”

“그냥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 사람도 그냥 좋아한다고 했어요. 물론 다르겠죠. 하지만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거 같아요. 호기심이든 뭐든 그냥 좋아했다가 현실을 만나면 그 그냥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냥이 되는 거죠.”

“희수 씨가 그 사람 얼마만큼 좋아했는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100일 사귄 사람과 12년을 오직 한 사람만 지켜보고 기다려 온 나를 비교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비교하는 게 아니라 전.. 상처받기 싫고 기분 비참해지는 것도 싫어요.”

“왜 상처받을 거라고 비참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시작도 해보지 않고.”

“그 사람도 그랬어요. 시작도 해보지 않고 왜 겁부터 먹냐고.”

“자꾸 비교당하는 거 정말 기분 나쁘네요.”

재민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오늘은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비교당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제 마음을 몰라주는 희수 씨가 밉네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희수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재민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소연아. 희수 씨 장애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편이지?”

“아니 그렇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누구보다 당당하고 밝은 거. 왜요?”

“그럼 내가 싫어서 그런 건가?”

“아마 그 사람 때문일 거예요.”

“너도 알고 있었어?”

“네 희수는 제가 모르는지 알지만 알고 있었어요. 희수 학교에 다른 친구 만나러 갔다가 희수가 그 사람이랑 있는 거 봤어요. 그 사람이 희수랑 사귀고 싶어서 몇 달을 쫓아다녔다고 들었어요.”

“그랬구나......”

재민은 다시 희수를 만나러 갑니다.

다시 만난 재민과 희수 ⓒ최선영

“희수 씨 닮아서 또 들고 왔어요.”

재민은 희수를 닮은 안개꽃을 건넵니다.

“그날은 정말 미안했어요. 속 좁은 놈처럼... 부끄럽네요.”

“아니에요. 기분 나쁘셨을 거예요. 제가 미안했어요.”

말없이 커피만 마시던 그들.

커피가 다 식어갈 즈음 희수가 먼저 말을 건넵니다.

“저.. 소연이 집에서 처음 봤을 때 많이 설렜어요. 집 앞에 몇 번이나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만나고 싶기도 했어요. 그 사람.. 재민 씨 닮아서 좋았어요. 그 사람이랑 있으면 늘 재민 씨 그림자가 함께 하는 것처럼 겹쳐지는 게 좋아서 감정 없이 사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헤어지고 그 사람이라 다행이란 생각했어요. 만약 그 사람이 재민 씨였다면 제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난 그 사람이랑 달라요. 희수 씨가 걱정하는 일, 그런 상황 절대 없을 거예요. 나 때문에 아파하는 일도 없을 거고.”

재민은 희수에게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희수는 재민과 함께 있는 시간은 장애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만큼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희수가 힘들어하는 계단 앞에서 등을 보이며 “내가 너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줄게.”라고 말하며 웃어 보입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재민은 희수를 등에 업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 재민과 함께 하는 희수도 많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때 왜 날 쳐다도 안 봤어요?”

“언제?”

“처음 소연이 집에서 보던 날.”

“나... 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봤어. 소민에게 너 얘기 그전에 많이 들었고. 늘 지켜봤었어. 그리고 네가 날 처음 봤던 날, 너 온다는 소리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몇 시간을 보면서 기다렸었는데.. 몰랐지?”

“그랬구나...”

“막상 왔는데 볼 수가 없었어. 너무 떨려서.”

“쳐다보지 않아서 좋았어요. 사람들은 계속 쳐다보거든요. 내 다리를, 걷는 걸 보는 것 같아서 싫은데 쳐다도 안 보는 게 좋았어요. 때로는 무관심이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네 다리 보는 거 아니야. 너무 예뻐서 쳐다보는 거지."

"호호, 알아요. 어쨌든 그날은 날 보지 않았던 게 좋았어요."

"하하, 소심한 성격이 좋을 때도 있었네."

재민의 집에 처음 인사 가던 날.

많이 떨고 있는 희수의 손을 잡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를 보냅니다.

재민의 부모님은 희수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12년을 마음에 품고 사랑했다는 말에 부모님은 아들의 선택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희수의 장애까지 예뻐해 줍니다.

아름다운 봄 향기 가득한 계절 그들은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고 사랑의 꽃을 피웁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재민과 희수 ⓒ최선영

편견 없는 그의 시선이 좋았던 희수와 그녀의 당당함이 예뻤던 재민은 그렇게 서로를 담고 사랑합니다.

희수의 말처럼 때로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무관심이 가장 큰 배려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잡아 주는 것이 배려입니다.

소심함에 떨려서 희수를 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희수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재민의 그런 깊은 마음을 알기에 희수는 그런 그가 고맙습니다.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에 함께 갑니다. 1년에 딱 하루 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함께 하는 어우러짐이 있기를 재민도 희수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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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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