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소를 만난 은수 ⓒ최선영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가 은수의 코끝을 간질이고 보랏빛 황홀한 색감은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처음 걷는 시골길. 은수는 그곳에서 만난 보랏빛 들풀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꽃과 눈을 맞추느라 소가 오고 있는 것도 몰랐네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은수는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황소의 눈을 보고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서 있습니다.

사진이나 TV에서나 봤던 소. 그 소를 은수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몸집은 많이 컸고 “음~매~” 울음소리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은수를 향해 소는 한걸음 두 걸음 다가옵니다. 당황한 은수는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길이 좁아서 피할 곳도 없고 오던 길을 빨리 되돌려 달려갈 수도 없는 은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그렁거리며 황소가 가까워질수록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습니다.

꼬리로 몸을 이리 척 저리 탁 때려가며 은수를 향해 오고 있는 소는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와있습니다.

은수는 양손으로 두 눈을 꼭 감싸고 바닥에 쪼그립니다.

“누렁아.”

어디선가 들리는 소를 부르는 소리.

은수는 손가락을 살짝 벌려 가는 실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을 보았습니다.

가늘고 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한 소년이 이쪽으로 달려옵니다.

소는 소년을 보자 은수에게 등을 보입니다.

“누렁아.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얼마나 찾았다고.”

누렁이라 불리는 소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소년을 보고 “음~매” 거립니다.

“넌 누구야?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소년은 은수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쪼그리고 앉아있던 은수는 일어섭니다. 일어서며 살짝 휘청거리자 소년이 잽싸게 은수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잡아줍니다.

재현과 이야기하는 은수 ⓒ최선영

“고마워. 난 저 아래 큰이모 집에 놀러 왔어.”

“저 아래? 아... 그 2층 양옥집?”

“응”

“사람들이 그 집 새로 지어서 이사 왔다고 부자라고 하던데. 좋겠다. 이모가 부자여서.”

소년은 천진스러운 얼굴로 방긋거립니다.

“이모 부자 아니야. 서울에서 살다 사업도 망하고 몸도 많이 아파서 작은 집 지어서 온 거야.”

“쳇~!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을 지어서 온 건데 망해서 왔다고? 작은 집이라고?”

소년은 좀 전과 다르게 볼을 퉁퉁 부풀리며 입을 삐죽거립니다.

은수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며 소년을 봅니다.

소년의 등 뒤에 있던 누렁이가 한걸음 앞으로 나오려고 하자 은수는 또 놀라 한 발짝 뒷걸음질을 합니다.

“괜찮아, 우리 누렁이 엄청 순해. 덩치만 크지. 그런데 너 아까 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어?”

“소를 처음 봐서 너무 무서웠어.”

“하하, 무서우면 도망가면 되지. 바닥에 왜 쭈그려. 그럼 더 위험하잖아.”

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소년에게 말합니다.

“나......, 도망 못 가. 빨리 달리지 못하거든.”

“왜? 다리 다친 거야?.”

“응 어릴 때 사고.”

소년은 그제야 은수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집까지 바래다줄까?”

“아니 천천히 혼자 가면 돼. 넌 누렁이랑 같이 가야지.”

“그럼 너 저기까지 가는 거 보고 갈게. 먼저 가.”

“아니야, 나 혼자 그냥 천천히 갈래. 잘 가.”

은수는 소년의 등을 떠밀며 그냥 가라고 보냅니다.

소년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은수가 있는 쪽을 힐끔힐끔 돌아봅니다.

은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오늘 너 만나서 다행이다. 정말 무서웠는데. 이름이나 물어볼걸.”

은수는 혼잣말을 하며 저만치 멀어진 소년의 뒤 모습을 바라봅니다. 소년이 많이 작아 보이자 은수도 천천히 집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야~”

소년이 다시 달려오며 은수를 부릅니다.

은수가 돌아보자 소년은 달리다 말고 큰소리로 “난 재현이야. 박재현.”라고 소리칩니다.

은수도 큰소리로 '유은수'라고 이름을 알려줍니다.

소년은 손을 크게 흔들고는 다시 누렁이가 멀뚱히 서있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유은수. 유은수. 이름도 예쁘네.”

재현은 은수의 이름을 입안에 굴리며 서둘러 집으로 향합니다.

“재현. 박재현.”

은수도 재현을 나지막이 불러보며 집으로 걸어옵니다.

“낯선 곳인데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걱정했잖아. 찾으러 나가려고 했는데.”

“엄마, 나 오늘 소 봤어. 엄청 크고 울음소리도 정말 커.”

은수는 신나서 자랑하듯 말합니다.

“무섭지 않았어?”

“처음에 무서웠는데. 괜찮았어. 아주 순한 녀석이었어.”

“어휴, 우리 은수 많이 씩씩해졌네.”

엄마는 은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냅니다.

“은수야 가방 챙겨.”

“왜? 벌써 가는 거야?”

“응 이모도 쉬셔야지. 다음에 또 오자.”

아빠가 서둘러 가자는 말에 은수는 괜스레 마음이 시무룩해집니다.

"왜? 길에서 화장실 냄새난다고 싫다더니 그새 여기가 좋아진 거야?”

은수는 엄마의 말에 대꾸 없이 가방을 메고 신을 신습니다.

“이모 아프지 말고 잘 지내세요.”

“그래 우리 은수 고맙다. 다음에 오면 이모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맛있는 거는 됐어. 언니 몸이나 잘 챙기고 있어. 형부한테 다 시켜.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는 거야. 이제 다 내려놨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건강만 챙기자.. 생각해.”

그곳은 큰이모에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모의 건강도 많이 좋아져서 작은 텃밭도 가꾸며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방학이 되자 은수는 큰이모 집을 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은수는 재현과 한 번의 겨울 방학 두 번의 여름방학을 함께 보냈습니다.

또다시 찾아온 겨울 방학을 재현과 보내기 위해 그곳으로 갔지만 재현은 없었습니다.

누렁이와 재현이를 만나기 위해 재현의 집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미선이를 만나 재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미선에게 재현의 소식을 듣고 있는 은수 ⓒ최선영

“재현이 이사 갔어. 누렁이는 큰 장 열릴 때 내다 팔았고. 재현이 삼촌이 장사를 했는데 잘 안돼서 빚보증 서준 재현이 집까지 다 넘어갔나 봐.”

“정말? 너 어떻게 알았어?”

“아빠랑 엄마 얘기하는 거 들었어.”

“그렇구나......”

은수는 재현이를 볼 수 없다는 말에 서운하기도 하고 재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은수는 그다음 여름방학 겨울방학도 큰이모 집을 갔습니다. 혹시라도 재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재현이 고향이니까 한 번쯤은 그래도 오지 않을까? 가기 싫다고 울먹이며 떠났다는데.”

한 가닥 기대는 그냥 희망일 뿐 재현이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재현이는 그곳에 오지 않았고 은수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큰이모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큰이모는 농사일을 시작해서 이제는 꽤 큰 과수원과 논밭이 생겼습니다.

“이제 대학생 되었으니 자주 놀러 와.”

자식이 없는 큰이모와 이모부는 은수를 친딸처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모집에 도착한 은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누렁이와 재현이를 만났던 그 길로 산책을 나갑니다.

“그때는 길이 많이 좁았는데 이제 차도 지나다닐 만큼 넓어졌고 작은 돌이 듬성듬성 밟히던 흙길이 매끈하게 포장도 되어있네. 여기도 이제 많이 변했다.“

모든 게 변해버린 것 같은데 그때 보던 그 보랏빛 들풀은 여전히 길가에 방긋거리며 피어있습니다.

들풀과 눈을 맞추며 코 끝으로 스며드는 향기를 마음 가득 담고 있는 은수 옆을 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옵니다.

“앗 누렁이랑 닮았다.”

사실 은수 눈에는 그날 이후 모든 소가 다 누렁이 같았습니다.

"누렁아, 안녕."

무서워서 덜덜거리며 쪼그리던 은수는 이제 없습니다. 소를 보고 반갑다며 말을 건넵니다.

“누렁아.”

멀리서 한 남자가 달려오며 소를 향해 소리칩니다.

낯익은 얼굴.

다시만난 재현과 은수 ⓒ최선영

“어.”

그 남자도 은수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뚫어져라 봅니다.

“혹시 은수?”

“너 재현이?”

둘은 길 한가운데서 한참을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삼촌의 빚보증을 선 탓에 경기도 광주에 살던 재현이는 마산까지 내려가 한 달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에 집도 다시 찾고 농사도 새로 시작했다는 말에 은수는 기뻐해 주었습니다.

“대학생이면 남자친구도 있겠네.”

“없어. 내가 눈이 좀 많이 높아서 내 눈높이에 보이는 남자가 없었거든.”

“하하, 그래. 넌 예쁘니까 눈 좀 높아도 돼.”

은수는 방학이 아닌 주말에도 큰이모가 있는 시골을 찾아갑니다.

말로는 이모와 이모부 외로울까 봐 자주 온다고 했지만 정작 이모와 이모부는 하루 종일 은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은수야.”

“응.”

“나 너 좋아해. 그런데......”

“그런데 뭐?”

“대학도 안 나온 내가 널 좋아해도 될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넌?”

“나? 뭐?”

“내가 장애인인데 상관없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래 우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자.”

“난 항상 누렁이가 고마웠어. 누렁이 덕분에 그날 널 만났잖아. 그날 이후 모든 소는 누렁이야.”

"나도.. 그래서 내가 키우는 모든 소는 다 누렁이야. 누렁이 1, 누렁이 2, 누렁이 3. 그리고.. 너와 함께 걷는 이 길도 난 좋아."

재현은 군대를 갔습니다. 그동안 은수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그곳으로 가고 있는 재현과 은수 ⓒ최선영

재현은 제대하는 날, 처음 만난 그 보랏빛 들풀이 피어있는 그 길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은수를 처음 본 그곳에서 재현은 은수에게 청혼을 할 생각입니다.

재현과 은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름다운 그곳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스치는 우연이 인연이 되고 운명이 되었던 그곳.

오늘 그곳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