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관람차 강릉에 다녀왔다 ⓒ구글맵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관람차 강릉여행을 다녀왔다. 실은, 워낙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라, 어렵게 어렵게 티켓을 구해 이미 평창동계올림픽도 관람했었다. 그런데, 또 다시 힘들게 티켓을 구해 패럴림픽까지 관람한 것이다.

물론, 오래 칼럼을 읽어 온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우리 가족은 여행과 스포츠 관람 등을 매우 즐긴다. 운전도 못하면서 전국 여기저기를 100% 기차와 버스, 지하철 등으로 종횡무진 돌아다니니까.

사실,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황에 아이 입학을 맞은 지출도 어마어마했던 데다가, 이미 평창동계올림픽 설상종목도 관람하고 그 구하기 힘들다는 ‘수호랑’ 한 마리까지 입양해 왔으니...

짠순이 아줌마 마인드가 냉큼 튀어나와, 패럴림픽까지 가는 건 중복투자일 수 있으니 가정경제의 안위를 위해 참아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만류했다.

하. 지. 만.

나의 이런 기우를 들은 남편은, 그렇다면 중복투자가 아니게 느껴질 수 있도록 플랜을 짜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동계올림픽 때는 평창으로 갔으니, 패럴림픽은 강릉으로,

동계올림픽 때는 설상종목을 관람했으니 패럴림픽은 빙상종목을 관람하고,

동계올림픽 때는 셔틀이 제대로 돌지 않아 1시간 30분 넘게 그 추운 데 서 있다가 KTX까지 놓치며 어마어마한 고생을 했으니, 이번에는 경포대 바닷가 앞에 있는 호텔을 제대로 저렴하게 구했다며, 내게 의기양양하게 여행 플랜을 들이대며 윤허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You win!

(모르긴 해도, 만약, 남편이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시각장애인들에게 특화된 여행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여행사를 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위에서는 농담처럼 패럴림픽은 가지 말까 고민했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우리 부부에게 있어 아이에게 평창 패럴림픽을 보여 주는 것은 오래 전부터 매우 중요한 계획이었다.

1988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 때, 나는 88 서울장애인올림픽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내게 매우 생생하게 남아 있는 특별한 추억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접한다는 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장애인 올림픽에 가 보니, 정말이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았고,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선수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내게 영어를 잘 한다(뭐, 초등학생이 해봤자 뭘 얼마나 잘했겠냐만은)며, 금속재질의 캥거루 모양의 베지를 선물로 주었고, 몇 년 동안 그 베지는 내게 매우 소중한 보물이자 추억이 되어 주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아저씨와 영어로 대화를 나눠 보았던 긍정적인 경험이, 내가 이제껏 자신감 있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또한, 장애를 잊게 할 만큼의 박진감 넘치는 외국선수들과 우리 선수들의 골볼경기를 보면서, 장애가 스포츠의 일부 규칙이나 구성요소가 되는 상황에서, 스포츠경기에서와 같은 비일상성 속에서 바라보는 장애가 조금은 허접하고 비루한 일상성 속의 장애와 달리 보이는 것을 경험한 어린 시절의 내 경험은, 장애부모를 가진 내 아이로 하여금 패럴림픽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강원도는 교통이 좋지 않은 편이라 여행을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었었지만, 경강선 KTX로 인해 시각장애인의 여행 반경이 넓어졌다. ⓒ은진슬

경강선 KTX는 시각장애인의 여행 반경을 훨씬 넓혀 주었다.

이전까지 강원도라고 하면, 워낙 교통이 좋지 않은 편이라, 그저 친정 콘도 회원권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놀러 가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 KTX만 타면 두 시간 안에 강릉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 같은 대중교통 여행자들에게는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아이 데리고 기차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 정도 거리는 우리에게는 가뿐한 근교여행 정도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10시 조금 넘어 강릉역에 도착하니, 아이를 데리고 나서는 우리에게, 장애인 및 영유아 동반한 교통약자들을 위한 하얀 카니발차량을 이용해도 된다고 안내해 주셔서, ts버스를 이용하려다가 편안하게 강릉 올림픽파크까지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차량은 교통약자라 하더라도 vip 카드 같은 걸 가지고 있어야만 탈 수 있는 거라고 다른 기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용객이 많지 않아 유연성을 발휘하여 우리를 태워 주신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본다.

동계올림픽 때보다 훨씬 따뜻해진 날씨에 하늘까지 맑아서인지, 올림픽파크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우리처럼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많아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서 속으로 뿌듯한 맘도 들었다.

우리가 관람할 경기는 이튿날 펼쳐지는 미국과 일본의 아이스하키 경기였기에, 첫날에는 동계올림픽 때 사진만 겨우 찍고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올림픽파크도 여유롭게 구경하고, 근처 경포해수욕장과 허난설헌 생가 등도 둘러볼 계획이었다.

우리 가족은 제법 오래 전부터 한국이 참가하는 경기 티켓을 구하고자 애를 썼지만, 이미 평창 동계올림픽 티켓을 구할 때부터 한국전은 경기 종목을 막론하고 모두 매진이어서, 어쩔 수 없이 빙상종목 중 박진감도 넘치고 재미있을 것 같은 아이스하키를 보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경기를 관람하러 갔을 때는 빈자리가 많이 보였으며, 우리가 휠체어 컬링을 체험하러 체험존에 갔을 때엔, 꼭 관람하라면서 한국전 티켓을 나누어 주기까지 했으니 조금은 억울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진 아닌 매진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마도 기업체 등이 티켓을 단체로 강매 당한(?) 후, 기부 등의 형태로 이곳 저곳에 나누어 주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아 자리가 비었던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볼 뿐이다.

사실, 내 주변에서도 패럴림픽에 가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인터넷에서는 이미 티켓이 다 매진되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경우가 많았기에 이건 좀 무엇인가 잘못된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러 후원사들의 홍보관을 볼 수 있었지만, 동계올림픽이 끝나고는 철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코카콜라, 더 노스페이스, 삼성 등). ⓒ은진슬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역시, 올림픽 경기 자체 뿐만 아니라, 후원사들의 홍보관, 색다른 조형물, 그야말로 다채로운 아이디어 상품들이 가득했던 기념품숍까지…

올림픽 파크에는 볼 거리가 제법 많았다. 삼성 홍보관에서는 여러 가지 VR 및 AR 체험과 로봇을 이용하여 스마트폰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다.(물론, 이응이 나이에 할 수 있는 VR이나 AR 체험은 거의 없어서 아쉬웠지만…)

코카콜라에서는 특별한 올림픽 에디션 코카콜라를 나눠 주는 행사를 했고, 노스페이스에서는 다양하고 멋진 글램핑 세팅을 해 놓고 있었으며, 현대기아차에서는 자동차 전시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동계올림픽에 갔을 때, 맥도널드가 햄버거와 감자튀김 모양의 건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이 햄버거도 먹고 사진을 찍기에 매우 좋은 핫스팟이라고 하여 엄청 기대하며 패럴림픽 때는 꼭 가서 햄버거도 먹고 사진도 찍고 오리라 벼르고 별렀으나…

사. 라. 졌. 다.

안타깝게도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패럴림픽 관람을 하러 온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많이 놀라기도 하고 기분도 좋았는데, 마치 이가 빠진 듯이 올림픽 후원사들이 패럴림픽 행사에서는 철수한 모습을 보니, 이게 바로 기업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기념품숍은 수호랑과 반다비들이 뛰노는 거대한 마트와도 같았다.(왕과 왕비 수호랑) ⓒ은진슬

지난 평창올림픽 때, 평소 마그넷을 모으는 아들을 위해 수호랑 인형과 마그넷 정도는 꼭 사주고 싶어 제대로 기념품숍 구경을 하려 했으나, 너무 기나긴 줄 탓에 평창 올림픽파크에서 기념품점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포기했었다.

그나마, 프리스타일 스키를 관람하던 휘닉스파크에서 수호랑 한 마리나마 겨우 데려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기념품숍 구경도 하고 싶었기에, 서둘러 조금 한가한 시간에 기념품숍에도 들렀다.

그야말로 기념품 구경이 당당히 매인 테마에 등극한 것. 그런데, 이곳은 기념품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광활하고 광대했다.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수호랑과 반다비들이 뛰노는 거대한 마트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예쁘고 갖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외국여행을 가면 머그컵과 마그넷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젠 마그넷은 아들 차지가 되었지만, 옛 생각에 수호랑 머그컵이라도 하나 건지려 했는데, 역시나 품절이었다.

아이는 여러 가지 기념품들을 구경하더니, 뭐니 뭐니 해도 수호랑이 외롭지 않게 반다비를 꼭 데려가야 한다며 반다비 인형과 수호랑 마그넷 하나를 골랐다. 나는, 아이가 새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만큼, 앞으로 차차 친구들과 친해져 마음을 나누고 싶은 친구들이 생기면 선물로 몇 개 나누어 주라고 베지 세트도 하나 샀다.

너무 멋진 탁상용 볼펜이 있어 여러 개 사고 싶었으나, 금액적 압박도 있었고 사람들도 점점 물결처럼 밀려오는 탓에, 내일 경기 관람을 마치고 다시 와서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념품숍을 나왔다.

그. 러. 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시는 기념품숍에 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이스하키 경기 관람을 마치고 기념품숍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뱀처럼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바람에 들어갈 엄두를 도저히 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나를 위한 기념품 쇼핑은 하나도 못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첫날에 가서 아이 것이라도 원하는 걸 살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관람객 식당에 자원봉사자들이 몇 명만 배치되어 있었어도, 장애인들이 조금은 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은진슬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파진 우리는, 관람객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사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까봐 엄청 걱정을 했었는데, 동계올림픽 때는 밥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먹을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겨우겨우 남은 것 중에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걸 주문해서 부실하게 식사를 해야만 했던 안 좋은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주문하러 가니, 그래도 아직은 몇 종류의 메뉴는 남아 있어서, 지난 번 보다는 선택의 폭이 그나마 넓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북적북적 거대한 인파 속에서 과연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식사를 받고 이동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식사 운반이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메뉴 안내나 식사 픽업 등을 도와줄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몇 명이라도 지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아이패드 줌으로 메뉴를 촬영하여 읽고, 음식을 받는 위치도 미리 촬영해서 파악하여 겨우겨우 그 아수라장 속에서 식사를 픽업하여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고 불편한 식사를 마치니, 일단, 숙소에 짐을 두려 체크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역시나 유연성을 발휘해 주신 하얀색 교통약자 이동차량을 타고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호텔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 일인데, 우리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시고는, 체크인을 하고 허난설헌 생가까지 가는 길도 태워 주신다고 흔쾌히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교통약자 이동지원차량으로 큰 도움을 주신 기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감사 마음을 전해 본다. ⓒ은진슬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장애가 있으니 당연한 듯이 뭘 해내라고 들이대는 스타일이 못 된다. 언제나 스스로 자력갱생하는 스타일인지라, 카카오지도를 보며 허난설헌 생가까지 15에서 20분여를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큰 도움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시각장애 여행자 입장에서, 목적지만 잘 찾아 다녀도 여행의 50%는 성공일 만큼, 낯선 곳을 효과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비록, 기사님은 이 칼럼을 못 보시겠지만, 지면을 빌어, 각별한 배려로 우리 여행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신 안영준 기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본다.)

강릉에는,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 시대의 천재 여류 작가인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다. ⓒ은진슬

허난설헌이라면, 홍길동을 쓴 허균의 누나로, 조선 시대의 빼어난 천재 여류 작가 정도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허균의 홍길동전 조차도 입시위주 교육에서 축약형으로 간략하게 배웠으니, 허난설헌의 시 같은 건 배운 기억조차 잘 안 난다.

허난설헌이 살았다는 생가와 그녀에 대한 여러 문헌들과 그림, 글 등이 전시된 기념관도 둘러 보았다.

물론, 시각장애를 가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예전 암기교육 시스템의 출중한 산물인 남편과 내가 어릴 적 배운 지식들을 저 뇌 속 깊은 곳에서 누룽지를 긁듯 박박 긁어모아,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아이는 글씨가 잘 안 보이는 엄마 아빠를 둔 탓에, 다섯 살 정도부터는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무리 없이 스스로 읽어 가며 얻어내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우리 보다 얻은 절대 정보는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결국, 허난설헌과 허균, 홍길동전 등에 대해서는 호텔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 사이 좋게 궁금증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여성의 능력을 존중해 주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에는 사대부 집안에서도 흔치 않게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문학적 재능을 비교적 자유롭게 표출하며 살았던 천재 시인 허난설헌.

그 시대의 명문가의 자제와 결혼했으나, 시를 쓰는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와, 그런 아내를 보듬고 감싸주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던 그리 스마트하지 않은 남편 때문에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아이를 돌림병으로 잃고, 뱃속 아이까지 유산하는 고통을 겪고, 아버지와 오빠까지 객사하며 집안까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결국,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스물 일곱의 이르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결혼을 하여 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녀의 고통이 좀 더 깊게 공감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응이가 말했다.

‘여보야가 잘못이네! 허난설헌 여보가 잘 해줬으면 그렇게 빨리 안 죽었을 수도 있을텐데…’

잠자리에 들기 전, 아직 홍길동전을 읽어 보지 못한 아이가 궁금해 하기에, 모바일 소리책에서 원문으로 전문 성우들에 의해 낭독된 홍길동전을 함께 들으며(물론, 어려운 말은 설명도 해 주었음) 잠을 청했다. (아! 이 얼마나 학구적인 가족인가!^^)

시원하게 탁 트인 동해바다는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모두 날리기에 충분했다. ⓒ은진슬

한편, 허난설헌 생가를 나선 우리는, 호텔 앞이 바로 경포 해수욕장이었기에,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겨울바다 구경을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원래는 뵈는 것 없어도 방법이 그것 뿐이라, 우리 가족은 도보여행에 최적화 되어 있는 편이다. 지도를 잘 읽는 능력과 튼튼한 기초체력에, 30분 정도 걷는 건 유아기부터 별 문제도 아닌 이응이까지… 그야말로 3박자가 고루 갖추어져 있다.

허난설헌 생가에서 30분 가까이 걸으니 탁 트인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동해바다는 한 4년 만에 온 것 같은데, 역시나 남해나 서해와는 달리 좀더 역동적이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역동적인 파도소리와 제법 센 바람이 여기가 동해라는 걸 제대로 실감케 했다.

이응이도 속이 뻥 뚫리게 시원하단다.

남편과 나 역시 그저 바닷바람을 느끼며 역동적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최근의 아이 수술과 이사, 초등 입학 준비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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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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