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규재의 그림 작업실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구석에 버려져 있는 그림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림을 집어 들어 보는 순간! 섬뜩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눈물은 줄줄 흘리며 울고 있는 사람 얼굴 그림이었습니다.

‘ 어머! 얘가 무슨 이런 그림을... 언제 그린 거야....’

엄마가 지금껏 봐 온 규재는 그림 소재로 ‘사람’을 그리지 않습니다.

유난히 사람과의 교류를 힘들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규재의 그림 소재는 그저 ‘산,천,초,목’을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그리는 집착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시 때마다 평론가 분들이 규재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 ‘판타지’라던가 ‘상상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등의 표현들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사람 얼굴 그림이, 그것도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이 아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는 얼굴 그림을 보니 기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복지관에서 돌아 온 규재를 불러 세워 물어보았습니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규재야~ 이 그림 제목이 뭐야~~?’

“ 눈! 물! 바! 다! ”

매우 짧은 대답 한마디 던지고 방에 들어가는 규재를 식탁에 앉혀서 좋아하는 간식을 들이밀며, 친절하고 자상한 엄마를 연기하면서 이것저것 유도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사람 얼굴 그림이라 제목이 슬픈 사람이나 우는 사람인줄 알았다... 왜 슬픈데 바다냐... 진짜 이 사람 슬퍼 보인다... 눈물은 왜 이리 줄줄 많이 흘리며 우냐... 왜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냐... 언제 그렸냐... 왜 엄마한테 안 보여줬냐... 등등

규재식의 횡설수설 대답을 정리해 보니

뉴스에서 바다를 보고 엉엉 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 세월호 뉴스를 보고 있었던 듯), “왜 울까요오~ ” 물었더니 엄마가 너무 어려운 얘기라서 어른 되면 얘기해주겠다... 진짜 너무 너무 슬픈 일이 생겼다.,, 사람은 너무 슬플 때가 가끔 있다... 규재 너도 눈물이 많이 나면서 마음이 속상할 때가 있었을 때를 생각해 봐라....

그래서! 이규재가 엉엉 울면서 너무 슬펐을 때는 6살 ㅇㅇ유치원 때가 생각났다.

2005년 4월 20일 수요일 11시, 미술시간에 칸을 넘어 간 미운 글씨가 있어서 다음 페이지에 다시 쓰려고 뜯었는데, 이규재가 노트 찢었다고 짝꿍이 선생님한테 일러서 착한 스티커를 못 받았다... 선생님이 또 엄마한테 일러서 이규재는 집 현관에서 회초리로 엄마한테 열 대 맞았다.... 너무 슬픈 이규재다... 이규재는 노트를 찢은 게 아니다... 그래서 눈물이 바다처럼 줄줄 흘렀다....

뭐, 대충 이런 얘기였습니다.

‘헐......’

이럴 때 요즘 젊은 사람들 표현으로 헐! 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6살 유치원 때 일을 육하원칙에 따라 기억을 쏟아내는 규재에게 엄마는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네가 바다처럼 눈물이 났다하니 많이 슬펐었나보다... 미안하다... 엄마가 사과한다... 생각해 보니 엄마가 그 땐 너무 힘든 일이 있었을 때라서 우리 규재한테 과했었다... 미안하다...

규재를 다독거리며 마음 아픈 지난 시간들이 무겁게 스쳐지나갔습니다.

규재가 그린 슬픈 기억 '눈물바다'. ⓒ김은정

그러고 보니 요즘 규재는 지난 일들을 얘기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 당시 그 느낌을 꽤 자세하게 어제 일처럼 얘기합니다. 듣고 있으면 그 때 이해되지 않았던 상황이 ‘당사자의 설명’에 의해 지금에 와서 알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감각을 통해 들어 온 정보를 ‘수용 입력’해서 ‘저장’하고 필요시에 정보를 꺼내 ‘재생 인출’ 시키는 단계를 거칩니다. 기억을 잘 하려면 정보를 잘 ‘저장’하는 것과 그것을 꺼내 쓸 수 있는 ‘재생 인출’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억이 잘 유지된다는 것은 정보를 기술적으로 잘 ‘저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재생 인출’ 능력 역시 탁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폐성장애인들은 시각적 기억 기능이 탁월해서, 모든 사물이나 정황을 사진 찍듯이 찍어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학설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양적 저장 능력이 크기 때문에 꽤 오래 전 일도 수용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재생 인출’기능도 비례적으로 발달이 되어있어서 암산이나 달력의 요일 계산 같은 남다른 암기나 계산을 하는, 능력 아닌 능력을 보이는 자폐성장애인들도 간혹 있습니다.

반면, 숫자적 계산이 아닌 스토리의 기억을 ‘재생 인출’ 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회상]은 상당히 질적으로 발전된 능력으로 ‘언어발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경험이나 물체, 사람, 사건에 대한 표상을 ‘언어화’함으로서 구체적으로 기억을 유지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자폐성장애인들은 유아기부터 수용언어나 표현언어의 발달이 늦고 추상적인 개념의 뜻을 이해하기 힘든 언어적 발달지연으로 단서 없이 외웠던 것을 기억해 내야하는 [회상]이라는 회로가 약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만, 요즘 규재나 성인기의 복지관 친구들을 보면 생활연령 성장에 따라 [회상]이라는 스토리 기억을 ‘재생 인출’하는 능력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점점 발달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천천히 느린 속도지만, 꾸준한 자극과 교육과 체험으로 ‘언어 발달이 확장’되면서 기억의 [회상]능력도 상승하는 듯합니다.

규재가 까마득한 지난 일을 날짜, 시간까지 기억하며 엄마를 고개 숙이게 만드는 ‘성장 포인트’가 올 줄 알았다면 규재가 즐겁고 행복한 추억거리만 머리에 입력, 저장, 재생할 수 있게 인생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짤 것을... 하고 후회중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라는 권력으로 규재의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들을 너무 낭비했습니다. 규재에게도 ‘시절’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미련한 엄마지만 이제부턴 규재와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세월을 계획할 생각입니다.

이담에 규재가 몇 년 몇 월 며칠, 무슨 요일, 몇 시에 깔깔 웃으며 즐거웠던 ‘기억 저장’을 ‘재생 인출’해서 ‘웃!음!바!다!’ 라는 활짝 웃는 사람 얼굴을 그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시간 설계를 ‘행복’에 맞춰야겠습니다.

‘행복’도 만들면,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우리 열심히 만들어 봅시다. ‘행복’이라는 것!!!!

우리 모두에게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시절’이라는 세월은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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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칼럼니스트 발달장애화가 이규재의 어머니이고, 교육학자로 국제교육학회에서 활동 중이다. 본능적인 감각의 자유로움으로부터 표현되는 발달장애예술인의 미술이나 음악이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적 가치로 빛나고 있음을 여러 매체에 글로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장애인의 예술세계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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