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원 소설집 <오리 날다>. ⓒ차미경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지상 35m 철탑에서 고공투쟁을 벌이는 부당해고 노동자는 그 외로운 철탑 위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꿈에서도 간절한 비정규직 철폐일까? 아니면 부당해고에 대한 사측의 사과와 해고철회일까?

나는 가끔 극한 상황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저렇게 고립된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무척 궁금하곤 했다. 그런데 신수원의 단편 <오리 날다>를 보며 무릎을 탁! 쳤다.

세상 그 어떤 급박하고 간절한 상황에서도 절대 피할 수 없는 욕구, <오리 날다>에 의하면 부당해고 노동자인 주인공 진복연이 철탑 위에서 내내 고민하는 것은 '똥을 어찌 누어야 할까' 이다.

여기서 나는 '배변활동'이라는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삼간다. 왜냐하면 '배변활동'이란 표현은 ‘똥을 눈다’는 표현보다 훨씬 덜 절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탑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위태하게 흔들리는 그곳에서 대체 똥은 어떻게 누어야 하는가... 얼마나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권리에 관한 문제인가 말이다.

진복연의 이 원초적 본능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오리변기다. 맞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그 귀엽고 앙증맞게 생긴 그 오리변기 말이다. 그런데 그건 아이들이 앉았을 때만 귀엽고 앙증맞은 것이지 거기에 앉는 사람이 어른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수치스럽고 모멸적인 것이다.

그 오리변기에 똥을 누기도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 아무도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 밤까지 기다렸다가 최대한 은밀히 일을 치러야 한다. 강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또 비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흔들리는 고공에서 그 자그만 오리변기에 앉아 변을 보는 일은 더없이 위태롭고 초라하다.

또 변을 보고 난 후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은 어떤가. 비닐에 꽁꽁 잘 봉해 밧줄에 매달아 아래에서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내려보낸다. 달아 내리다가 비닐이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대참사를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흔들리는 고공 철탑 위에서 진복연, 그녀가 매일 고민하는 것은 노조의 그 어떤 대의명분도 요구관철도 아닌, 바로 '똥 누는 것'이다. <오리 날다>가 그려낸 그 수치심과 모멸감의 극치를 나는 소름이 끼치도록 공감했다.

나에게는 화장실에 대한 유별난 트라우마가 있다. 장애인편의시설이 전무했던 열악한 학창시절을 보낸 탓에 초중고 학창시절 12년 동안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견뎌야 했던 건 입시도 성적도 아닌 오로지 '화장실을 가지 않고 참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화장실은 교실 건물과 따로 떨어져 아주 멀리 있는데다가 푸세식이거나 소위 고무신 변기가 전부인 그런 화장실이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어라 참을 수밖에... 그래서 물을 잘 먹지 않고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은 화장실 스트레스 때문에 몸에 밴 오랜 습관이다.

수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은 날은 그야말로 내게는 최고로 운이 나쁜 최악의 날이다. 빵 터질 것처럼 요의가 극에 달하는 날엔 그 어떤 영어단어도 수학공식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화장실 문을 열며 안절부절하는 꿈을 종종 꾸곤 한다.

오리변기. ⓒ차미경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내가 걱정스러웠던 엄마는 나를 위해 비상용으로 교실 맨 뒤 청소함에 오리변기를 가져다 놓았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 사용해야 했던 바로 그런 오리변기... 나는 죽어라 싫다 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그걸 어찌 참냐며 비상시에만 사용하면 되지 않겠냐며 굳이 그걸 가져다 놓았다.

청소함을 열 때마다 반 친구들이 이게 뭐냐며 궁금해하는 모습도 어린 내겐 너무 창피하게 여겨졌고 아무리 급한 상황이 와도 거의 70명이나 되는 반 아이들 앞에서 용변을 볼 용기는 죽으면 죽었지 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청소마저 다 끝나고 아이들이 다 돌아간 뒤 나를 데리러 올 엄마를 기다리며 교실에 앉아 있는데 미친 듯이 소변이 마려웠다. 방광은 터져버릴 것 같은데 엄마는 웬일인지 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학교는 너무나 고요했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그 고요가 어쩐지 맘이 놓였고 그 정도라면 청소함에 놓인 저 오리변기를 사용해도 좋을 거 같은 용기마저 일었다.

그래서 터져 나올 듯한 소변을 참으며 가까스로 청소함으로 기어가 오리변기를 꺼내 거기 앉아 드디어 시원한 방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드르륵 교실문이 열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내가 소변을 보고 있다는 그 시원한 감각도 사라졌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얼음이 돼 버렸다. 정작 담임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분명 ‘모멸감’이었다.

<오리 날다>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처참한, 모멸감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필 그날 진복연은 동료들이 큰맘 먹고 올려다 준 생선회를 맛나게 먹었다. 그런데 그날 밤 배탈이 나버린 것. 생각해 보라, 그냥 똥이 마려운 정도가 아니라 설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배탈이다.

흔들리는 철탑 위에서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불안하게 오리변기에 앉아 설사를 했다. 젠장... 설사인 탓에 비닐봉지에 제대로 밀봉하여 싸기도 난감하게 됐다.

그래서 잠시 변기에 놓아두고 지체하는 사이 공교롭게도 경찰들이 강제연행을 단행하러 철탑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녀는 과연 어찌해야 할까.

오리변기를 엉거주춤 들고 서서 ‘제발 올라오지 마!’를 중얼거리던 그녀에게서 나는 변기에 앉아 담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던 어린 시절 그 순간이 떠올랐다. 모멸감으로 깊이 베인 그 상처의 쓰라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영화<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에서. ⓒ네이버 영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역시 내가 가장 강렬하게 공감한 것은 ‘모멸감’이다. 평생을 목수로 살았던 다니엘이 지병인 심장병 악화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실업급여를 신청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인터넷으로만 이루어지는 모든 지원서비스 신청절차 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컴맹인 다니엘에겐 너무 힘겨운데 그를 대하는 공무원들의 ‘인간은 없고 원리 원칙만 있는’ 무심하고 냉담한 태도에 수치심마저 든다.

혼자 힘으로 두 아이를 힘겹게 키우고 있는 케이티 역시 착오로 생활지원금을 받지 못해 어려운 처지다. 불기운 하나 없는 낡고 차가운 집 안에 전기료 연체로 전기마저 끊기고 만다.

없는 식량을 쪼개 아이들만 챙겨 먹이고 정작 자신은 굶다가 결국 허기진 케이티가 마켓에서 음식을 몰래 훔쳐 입안으로 우겨 넣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는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생계, 아니 생존의 절박함 때문에 끝내 성매매의 유혹을 받아들인 케이티. 그걸 눈치채고 그녀를 찾아간 다니엘과 맞닥뜨린 순간 케이티의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까지...

"I am a man, not a dog."(나는 사람이지, 개가 아니다.) 영화 속 다니엘의 이 절규는 우리 장애인운동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박경석 대표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퍼포먼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는 모든 사회적 약자의 투쟁 동기는 어쩌면 바로 이런 '모멸감'에서 비롯될지 모른다. 그 어떤 고상한 대의명분도 그 원초적 모멸감보다 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내 기본적인 권리를 당당하게 존중받으며 살 권리, 이 기본적인 권리와 원초적 생존의 욕구가 무시되고 묵살 당할 때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갈 수 없는 화장실, 오를 수 없는 계단, 이동의 자유를 현저히 제한하는 대중교통 시스템, 불러주지 않는 일터... 이 모든 현실 상황들에 많은 장애인들은 아직도 깊은 ‘모멸감’과 수시로 맞닥뜨린다.

마치 절망적으로 오리변기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진복연처럼, 나는 개가 아니라고 외쳤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그 모멸감의 깊이를 한 번쯤 사회가 돌아봐 주기를...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