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나만의 싸인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예전에는 각종 신청서나 민원서식 등에서 주로 도장을 사용했지만 근래에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도장 대신 서명으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서식 작성에서부터 일정금액 이상의 신용카드 결제에까지 서명이 널리 사용된다. 그만큼 서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렇다보니 시각장애인도 서명을 해야 하는 상황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들을 위한 서명을 연습하는 프로그램까지 생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장대신 서명을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 편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점자를 문자로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불편이 더욱 크다.

저시력인도 마찬가지다.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경우는 대신 날인해 줄 것을 부탁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서명란으로 바뀌게 되면서 다른 서식들은 대신 작성해 주어도 서명란 만큼은 반드시 본인이 서명해야 한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곳이 서명하는 칸인지 조차 구분이 가지 않아 일일이 서명란을 손으로 짚어 달라 하고 서명해야 하는데 펜을 가져가면 손가락을 치워버리는 경우도 많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의 위쪽에 써야할지 아래쪽에 써야할지 몰라 정해진 칸에서 벗어난 곳에 서명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서명은 시각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상생활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장애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장애로 인해 겪는 불편이나 어려움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서명 정도는 문자 그대로 ‘작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이렇게 글까지 써가며 이야기 할 문제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고속도로 위에 놓인 작은 돌맹이 하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듯 서명란 또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예를 한 가지 들어 볼까 한다.

요즘은 유독 지인들 중 무직상태가 되는 이들이 많다. 정작 그들은 느긋한데 내가 더 조급함을 느낀다. ‘직업재활’이라는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취업, 일자리 이런 것에 연연하게 되고 실업이라는 단어 자체에 답답한 심정이 되곤 한다.

이런 마음에 지인이 취업할만한 곳이 없는지 찾아보기 위해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홈페이지(www.welfare.net)에 접속해 이런 저런 채용공고들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 눈에는 좋은 것만 보이고 나쁜 사람들 눈에는 나쁜 것만 보이듯 비뚤어진 사람 눈에는 비뚤어진 것만 보이는지 채용공고들 중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한 장애인거주시설의 채용공고 부분캡쳐ⓒ조봉래

한 장애인거주시설의 시설장을 뽑는 채용공고문이 그것이었다.

준비서류에 입사지원서, 자기소개서, 경력사항 등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는데 자필로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것이다. 80년대 컴퓨터가 흔한 기기가 아니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이해할 수 있겠다.

아니 십분 양보해서 장애차별이나 이런 것을 모르고 일반 기업체 등에서 손글씨를 많이 안쓰는 시대에 특색 있는 인물들을 채용해보기 위해 자필로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조건을 달았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다.

그 어느 구인업체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있을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자필로 입사지원 서류들을 작성해서 내라고 하는 것에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해당 채용공고를 게재한 시설이 전체유형의 장애인들을 위한 거주시설만 되었더라도 그럴 수 있겠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고는 장애인거주시설인데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거주시설이기까지 한 곳에서 올린 게시물이란 점에서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각장애인이 거주하는 시설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일할 사람들을 뽑는데 자필로 지원서를 작성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은 입사지원의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한다.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재활 등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시각장애인은 입사지원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민간 기업이나 기관 등에서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재활을 위해 이들이 일할 기회를 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채용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을 골라서 씀’ 정도로 정의되어 있다. 이 말처럼 구인하는 기관이나 기업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원해 볼 기회조차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렇게 장애인 시설에서도 지원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장애인고용에 냉담한 우리 사회에 대해 무어라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시설이 무슨 자격으로 장애인의 자립과 재활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얼마전 한 유형의 복지시설의 평가지표 설명회에 다녀왔다.

지표설명 중 유독 충격적이었던 내용이 있었다.

해당지표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으려면 복지시설의 종사자를 채용할 때 이력서에 종교를 적는 란을 만들면 안 되는 것뿐만 아니라 외모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사진도 부착하면 안되고, 학력차별을 막기 위해 출신 학교 등도 기재하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복지시설 종사자 채용에 이처럼 외모와 학력 까지도 차별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는 상황에서 장애차별적인 채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까 한다.

장애인 복지기관들 먼저 냉정한 자기성찰을 해 보아야 한다. 장애인 복지기관들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우리 사회 전체에 장애차별 철폐와 장애인고용 등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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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래 칼럼리스트 나 조봉래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보조공학부를 총괄하며 AT기술을 이용한 시각장애인의 정보습득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고, 최근에는 실로암장애인근로사업장 원장으로 재직하며 시각장애인의 일자리창출을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장애와 관련된 세상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소홀히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아끼지 않는 숨은 논객들 중 한 사람이다. 칼럼을 통해서는 장애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나 놓치고 있는 이슈들을 중심으로 ‘이의있습니다’라는 코너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갈 계획이다. 특히, 교육이나 노동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대중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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