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널브러진 낙엽. ⓒ 최선영

‘바스락바스락‘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바람에 몸을 맡긴 체 뒹구는 낙엽들의 흐트러진

몸짓을 살포시 밟으며 가을 길을 걷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너를 시험장에 데려다주고 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 수인이가 수능을 보는구나”

“그러게요 엄마... 세월이 정말 빠르네요”

“실기시험 치고 나와서 펑펑 울던 네 모습을 생각하면 이 엄마는 아직도 가슴이 아프구나”

“엄마도 참... 수능 때마다 그 얘기를 하시네요.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바스락거리는 두 사람의 걸음은 작은 카페 앞에서 멈춰 섭니다.

“어머 여기 새로 생긴 것 같아요, 커피 맛 좀 보고 갈까요?”

두 사람은 카페로 들어가 아메리카노와 녹차라테를 주문합니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은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들의 자유로운 몸짓을 보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은영이 네가 처음 피아노를 하고 싶다고 했던 게 일곱 살 때였지?”

“네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일곱 살 때였네요”

일곱 살 은영의 가을... 그 가을로 그들의 기억은 되돌아갑니다.

피아노를 하고 싶다는 은영이를 데리고 엄마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갑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피아노 선생님은 엄마에게 은영이가 벌써 바이엘 상을 끝냈다는 이야기를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바이엘 상을 끝냈다는 선생님 말에 엄마도 놀라워하며 많이 좋아했습니다. ​

활짝 웃으며 학원 가는 은영. ⓒ 최선영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도 은영이는 절대 학원을 결석하는 일 없이 늘 활짝 웃으며 학원을 갑니다.

발목까지 눈이 소복이 쌓이던 추운 겨울에도 피아노 학원은 꼭 가야 한다며 은영이는 불편한 다리로 학원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오지 않아 학원 문을 일찍 닫으려 하던 선생님은 미끄러운 눈길을 엄마와 걸어오는 은영이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렇게 시작된 은영이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그 겨울의 추위까지도 녹이며 체르니 30번을 9개월 만에 끝냈습니다.

은영이 부모님은 은영이를 위해 1학년 생일 선물로 피아노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학교 다녀오면 피아노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연습하는 은영이를 보며 페달을 밟지 못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아빠는 피아노를 전공하려는 생각을 할까 봐 걱정스러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은영이는 아빠가 걱정하던 대로 예술중학교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피아노를 전공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특수 제작을 통해 페달 밟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무렵, 은영 아빠의 회사가 부도까지 나서 더 이상 레슨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은영이는 피아노를 계속하겠다고 하면 아빠의 마음이 아플까 봐 일곱 살 때부터 마음에 품었던 피아노에 대한 꿈을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습니다.

​"은영아 아빠가 힘들까 봐 피아노를 하지 않겠다는 거라면 조금만 기다려주면 아빠가 다시 레슨받게 해줄게"

"아니에요 특수 제작해서 페달을 밟을 수는 있지만 어려움이 많아요. 피아노는 그냥 취미로만 할게요"

그림을 그리는 은영. ⓒ 최선영

피아노만큼이나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던 은영이는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다 피아노보다는 경제적 부담도 덜하고 장애와 상관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피아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마음 한편에 남겨둔 체 은영이는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 그녀가 대학 입학 실기시험을 보러 간 날. 석고 데생을 그리는 시험장에 들어선 그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젤만 가득 놓여있고 의자가 없었습니다. 다른 수험생들도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은영이만큼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은영아 어떻게 해?...”

은영이 친구들은 은영이를 걱정했습니다.

“의자 달라고 얘기해보면 어떨까...”

경주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내가 의자를 달라고 하면 줄지 안 줄지도 모르고... 내가 의자에 앉으면 간격을 뒤로 더 물려야 하는데, 그럼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혜택이라도 입는 것처럼 보이는 거 싫어”

“야~ 이건 특별한 혜택이 아니잖아, 4시간을 어떻게 서서 그리려고... 내가 얘기해볼게”

같은 학원을 다니는 준형이 두리번거리다 감독관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불편해서 그러니 의자를 달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감독관은 잠시 망설이다 의자 없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그려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저만치 가버립니다.

은영이를 알지 못하는 다른 몇몇 수험생들도 은영이를 걱정해주었습니다. 클러치를 집고 석고의 각도를 재가며 스케치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은영이는 차분하게 잘 그려나갔습니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은영이는 다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오래 서 있은 적이 없어서 이 정도로 많이 아플 줄 몰랐던 은영이의 다리가 저려왔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서 그림 그리다 힘들어 하는 은영. ⓒ 최선영

나머지 두 시간을 어떻게 서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 이후의 시간은 힘들었습니다.

양쪽 클러치를 사용하는 은영이가 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그만큼 다리에 힘을 더 주어야 했고, 네 시간을 서있는 동안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나올 때는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시험장을 빠져나온 은영이는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펑펑 울음을 터트렸습니다.친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또 울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부모님은 차마 은영이 곁으로 다가올 수가 없어 영문도 모른 채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나중에 4시간을 서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가슴 아파했습니다. ​

피아노에 대한 꿈을 접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은영이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다음날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나온 은영은 떨어질 거란 걸 알았지만 두 번 째 정공 실시시험이 있던 날 일찍 일어나 아무 일 없다는 듯 가서 그림을 그리고 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었던 대학에는 실패했지만 은영이는 장애 학생들에게 더 많은 배려를 해주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카페로 돌아옵니다.

“은영아, 너 그때 참 많이 힘들었지? 처음 대학 들어가서 다니기 싫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잠깐 그랬었죠... 다니면서 저에게 맞는 학교라는 생각에 좋았어요”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그들은 그때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된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변에 이야기 들어보면 그때, 대학에 합격하고도 장애 때문에 입학을 거부당하기도 하고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다는데... 그런 일들이 지금도 가끔 일어나는 걸 보면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참 안타까운 일이지”

두 사람은 다시 거리로 나옵니다.

활짝 웃고 있는 은영과 엄마. ⓒ 최선영

‘바스락바스락’

“난 이 소리가 왜 이리 짠... 한지...”

“전 이 소리가 좋은데요. 소리 없이 뒹굴던 녀석들이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자기 소리를 내는 거잖아요. 사람의 걸음이 좋다고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그 소리에 깊은 가을을 느끼고...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서 저는 좋아요”

“호호, 듣고 보니 그러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이 어우러져 하나가 될 때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우리 수인이가 사는 세상은 그러기를 바라자꾸나”

“네 우리 수인이 보면... 엄마가 장애인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장애인에 대한 편견 같은 게 없잖아요. 다 똑같다고 늘 말하고 수인이 친구들도 다들 그렇고...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성숙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며 수인에게 줄 수능 응원 초콜릿을 사러 들어갑니다.

“수인이는 초콜릿 좋아하니까 요걸로 사야겠구나”

“네 수인이 벌써 책상 한가득 찹쌀떡이랑 엿이랑 엄청 많이 받았어요. 작은 걸로 사주세요.”

수인에게 줄 수능 선물 상자. ⓒ 최선영

수인이에게 줄 ‘수능 대박’이라고 적혀있는 초콜릿 상자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의 노래를 들으며 이번 수능에서는 장애 때문에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수험생이 없기를 바라봅니다.

수험생을 응원하는 문구 ⓒ 최선영

그동안 수고한 모든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길 곳곳에 남기며 환한 미소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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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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