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학 전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와 함께 해야 하는 과제가 유치원으로부터 심심치 않게 주어진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자신의 과제를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아이와 과제를 함께 수행하며 생각의 지평도 넓히고 학습적 효과도 얻을 수 있기에, 이러한 활동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중요하다면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유치원 아이들이 벌써부터 과제 같은 걸 신경 쓰냐,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사실, 아이 말에 따르면, 유치원에서 내준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오는 아이들도 종종 있으며, 그것에 대해 별다른 속상함이나 불편 감을 느끼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고는 하니까.

하지만, 엄마인 나도 유치원의 교육활동과 선생님의 말씀에 적정한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쪽이며, 아이도 뭐든 잘 해내고 싶어하는 성향이기에, 남편과 나는 아이가 유치원 과제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남편이나 나나, 선생님의 지도와 과제 등에 적정한 권위를 부여하며 성실하게 잘 따르는 것이, 학교에서의 탁월한 수학능력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준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법 긴 시간 칼럼을 써 오면서,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교육철학 및 운영 스타일에 대해 언급하곤 했는데, 아이 유치원은 몬테소리유치원이라 한글을 받아쓰고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어 특별활동 같은 걸 하지는 않지만, 월별 주제전개에 맞춘 작품 활동, 동시 짓기 등의 창의적 과제는 제법 나오는 편이다.

아이의 유치원은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어 특별활동 같은걸 하지 않는 대신에, 월별 주제 전게 맞춘 창의적 과제가 나온다. ⓒ은진슬

나의 경우, 이런 부분을 미리 알고 시각장애엄마로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와 각오도 하고 선택한 유치원임에도, 내 장애로 인해 함께 수행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과제들을 종종 접할 때면, 아직도 스트레스게이지가 상승하곤 한다.

당연히, 다른 엄마들보다 아이와 함께 과제를 수행하는 시간도, 시각장애인이 공부할 때 늘 두, 세배의 시간이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초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만약, 시각장애를 가진 부모가 영어유치원이나 몬테소리 유치원 등, 소위 특정한 활동에 특성화 되어 부모의 품이 많이 드는 유치원 입학을 고려한다면, 본인의 성향이 소위 FM이라고 불리울 만큼 성실한지, 시간 관리에도 탁월하며 스트레스 관리도 잘 하는 사람인지를 체크한 후, 이런 유형의 유치원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현실적으로 말해, 아무리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고려한다 해도, 그 분들의 연배나 유치원에서 요하는 활동 등이 적절한 도움을 받기에 적합할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엄마가 주도권을 가지고 아이 유치원 활동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10일 간의 아주 긴 추석 연휴를 앞둔 유치원 하원길.

유치원에서는, 월초면 늘 나오는 이달의 주제전개를 위한 활동지, 매주 나오는 독서활동지와 함께 원통베틀과 실까지…

한가위 과제 보따리 선물을 한아름 안겨 주었다. (여기에 더해, 1주 전에 미리 공지되었던, 20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백감사 미술작품과 23일까지 완성해야 하는 돈보스꼬기자단 발표 준비까지 해야 한다는 건 안 비밀이다.)

한가위 과제 선물이었던 돈보스꼬기자단 발표 자료. ⓒ은진슬

아무래도 추석 연휴에는 나들이도 많고, 시각장애를 가진 내 입장에서 과제수행속도를 감안할 때,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 싶어, 돈보스꼬기자단 준비는 이미 공지 나온 주부터 아이와 발표주제를 요즘 푹 빠져 있는 야구로 정하고, 아이와 함께 참고해 읽을 수 있는 책도 한 권 사서 하루에 한 장씩 야구에 대한 7세 아이 눈높이의 리서치를 하며 그 날 배운 주제를 함께 한 문장으로 적고 참고할 사진을 찾아 PPT를 만드는 일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독서활동지 역시 아이가 유치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자마자 읽고 연휴 전에 미리 마쳐 두었고, 월별 주제전개 활동지야 매월 간단히 하는 일이라 연휴 중에 충분히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20일 제출해야 할 감사작품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이 역시 공지 나오자마자 아이와 함께 만들 작품을 정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돕기에 어떤 수준, 어떤 방법의 작품이 구현하기 쉬울지를 다 판단해 두고 있었던 상태라, 연휴 동안에는 다이소에서 재료를 사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만 해 두면 연휴 뒤에 활동보조 이모님께 시각적인 도움만 약간 받으면 될 상황까지 만들어 둔 상태라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뜻밖의 복병이 하나 나타났으니…

그건 바로, 몬테소리 원통베틀 활동이었다.

1학기 7세 몬테소리과정 소개 때, 가을학기가 되면 아이들과 원통베틀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도리 뜨기를 하여 집으로 가져가게 된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뜻 밖에 집으로 온 것이었다.

선생님 설명 당시에는, 가정연계활동으로 진행한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함께 온 공지에 보니, 추석연휴도 길고 2학기 내에 모두 안정적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속도를 좀 더 내고자 가정으로 보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몇 개의 그림을 포함한 원통베틀 조작방법 설명과 함께.

아아아아아아아아!!!!!!

멘.탈.붕.괴.

그래도 혹시나, 코바늘뜨기는 가정시간에 해 봤으니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냘픈 희망으로 그림도 안 보이면서 확대경을 들고 안 보이는 글씨를 겨우겨우 읽어 봤지만…

눈이 안 보이는 건 그렇다 치고, 그 과정 자체가 인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내 선에서는 안 될 일임을 확인하고는, 젊은 시절 동대문시장에서 수예점을 두 개나 운영하셨던 우리 엄마와 미술전공자로 탁월한 손재주의 소유자인 동생을 믿고 추석 날 친정에 가져갔는데...

편물과 수예 관련 기계도 다루시는 프로인 엄마조차도 설명지를 보고도 원통베틀의 원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셨다. 여동생도 설명서에 어떤 사전과정 하나가 빠져 있는 것 같다며, 이해할 수 없으니 인터넷에 혹시 나와있나 찾아본다며 검색까지 했지만, 흔한 활동이 아니어서인지 일반베틀조작법만 검색될 뿐이었다.

그야말로 일곱 살 아이 몬테소리활동 하나 때문에 추석날 온 가족이 가족회의 아닌 가족회의까지 하게 된 것.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일곱 살 아들의 얼굴이 이내 근심에 가득 찼다. 외할머니 집에 가면 이 난제가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렇지 못한 것이 실망되고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아들은, 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유치원 과제를 한 번도 안 해간 적이 없는 모범생이다. 물론, 앞으로 최소 12년간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아들이 학교와 선생님에 대해 존중하고 권위를 부여하며 성실한 태도로 학교생활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지도하는 엄마의 교육 철학 탓도 이에 한 몫 했겠다.

하지만, 아이 자체도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고, 그 결과로 잘 한다는 평가를 받기를 원하는, 소위 열심히 하여 돋보이고 싶어하는 스타일이기에, 그런 측면을 잘 살려 돕기 위해 내가 더 열심히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걱정스러워 하며 심각해진 아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는, 엄마가 베틀에 편지를 써서 선생님께 보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생님도 상황을 아시면 이해하실 거라고 다독였다. 그 날은 두 명의 사촌동생과 두 명의 사촌누나 형아와 놀아야 했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는 않는 듯 했다.

그런데…

기나 긴 연휴를 끝내고 등원하던 아침, 편지를 포스트잇에 써서 베틀에 넣는 나를 보며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낙엽을 주워 좋아하는 곤충을 만들어 보는 숙제를 하면서도, 감사 작품을 만들 미술재료를 사면서도, 아들은 사실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한 번도 숙제를 못해간 적이 없는 아이 입장에서는, 나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이었던지, 숙제를 못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선생님께 혼날까 봐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들을 꼭 안아주며 상황 설명을 다시 한 번 해 주고, 엄마가 선생님께 전화로도 잘 설명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는 아이를 잘 다독여 유치원에 보내긴 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어차피 시각장애 맘으로서 몬테소리교육과정이 시행되는 유치원을 선택한 이상, 내가 감당할 것들은 어느 정도 각오했고, 지금까지 미술활동이든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온갖 기상 천해한 잔머리를 굴려가며, 여느 엄마들 못지않게 최선을 다해 함께 해 왔는데, 이래 뵈도 내가 산전수전 다 겪어낸 몬테소리유치원 말년병장 계급장을 단 엄마인데, 처음으로 철저한 불가능과 맞닥뜨리고 보니, 나 자신이 루저가 된 느낌이 들어 엄마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저, 선생님께서 속상한 아이 마음을 잘 읽어 주시고, 다독여 주셨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엄마로서의 자기효능감이 오랜만에 지하 100층까지 떨어지는 듯한 그런 아침이었다.

휴! 그나저나 곧 백감사작품 만들기와 무시무시한 운동회가 기다리고 있구나!

아이 5세 때 처음으로 경험했던 유치원 운동회의 멘탈 탈탈 털리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시각장애엄마가 아이와 함께 체육활동을 하고, 미술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지 과연 선생님들은 알까? 백조의 보이지 않는 발버둥도 지겨운 그런 날이다.

나와 아이의 멘탈을 마구 흔들어 놓았던 원통베틀 활동 ⓒ유튜브

아이를 보내고는 이 날은 일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하필이면 오랜 연휴 끝이어서인지, 일찍 전화를 드렸는데도 선생님과도 수업 전 통화가 안 되었다. 그래도 편지를 써 두었으니 아이 맘을 잘 다독여 주시리라 믿고 일을 하고 있다가, 오후에서야 선생님과 통화가 되었다.

선생님과 통화를 하면서, 원통베틀활동 문제로 아이가 많이 걱정하며 울고 갔다는 말씀도 드리고, 아무리 다른 사람 도움을 받아서 해결해 보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좀 당황스러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내 말을 들으신 선생님, 우리 가족이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주신 한 마디…

‘많이 마음 쓰셨죠? 사실, 이응이 말고도 다른 아이들도 못해 온 친구들이 많았어요. 실은, 저희가 드린 설명서에 사전 과정 하나가 빠져 있었거든요. 동영상도 E-알리미에 올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못해서… 죄송해요.’

그랬다. 결국, 내가 눈이 멀쩡했어도 못했을 수 있는 상황, 내 동생이 설명서를 예리하게 판독했던 것이었다. 솔직히, 아이와 함께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너무 허탈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앞으로 다. 그래서, 심호흡 한 번 하고는…

앞으로도 주말에 원통베틀을 보내 주셔도 내 시력으로는 핸들링 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만약, 크게 형평성과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응이가 좀 더 자유로운 방과후 과정 반에 있을 때 이 부분을 유치원에서 좀 도와주실 수 없을지를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조치해 두겠다고 말씀 하셨다.

처음으로 내 노력으로 날고뛰어도 안 되는 일을 경험했고, 선생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종종 생길 텐데, 큰 공부 했다 여기며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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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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