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할머니 그림.ⓒ최선영

‘부스럭부스럭‘

좀처럼 깊은 잠을 들지 못하던 연희 할머니는 살며시 일어나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새벽빛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침대 옆 창문을 살짝 열고는 아직 남아있는 가을비가 남기고 간 눅눅한 비린내를 맡으며 일기예보에 없는 비가 혹시 내릴까 걱정을 담은 혼잣말을 마당 잔디 위에 심어봅니다.

“요 녀석들 그새 얼마나 또 컸을래나...”

할머니는 손자들 생각만 해도 미소가 흘러나옵니다.

“애들 다녀간지 두 달도 안됐는데 그새 얼마나 컸을라고... 허허”

자리끼를 들고나가려던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애들은 매일 봐도 자라는 게 보이잖아요 두 달이면 한 뼘은 자랐을 텐데..”

“허허 그건 그렇지.. 애들 오면 하루 종일 앉아있어야 할 텐데 좀 더 누워있어요”

할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앉아있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괜찮아요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괜찮다며 살짝 미소를 보내고는 다시 창밖을 내다봅니다.

어느새 창 너머에는 환한 아침 햇살이 내려와 잔디 위에 잠자고 있던 이슬이들을 깨웁니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연희네가 건너옵니다.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연희와 연동이가 쪼르르 달려와 연희는 할아버지 어깨를 두드리고 연동이는 할머니 다리를 주물려드립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가에 행복이 피어납니다.

할아버지 폰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전화기 너머에 민우의 또랑 거리는 목소리가 굴러 나와 할머니 귓전을 울립니다.

“어이쿠 우리 민우”

폰을 들고 있는 할아버지와 옆에 있던 할머니는 동시에 민우를 부릅니다.

곧 도착한다는 민우의 말에 온 가족이 들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민우 현우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르며 마당을 뛰어들어옵니다.

“어서 오너라”

할아버지는 반갑게 민우와 현우를 안아줍니다.

“고새 또 많이 컸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보내며 작은 아들 내외를 맞아줍니다.

손자들을 안고 기뻐하는 할머니 그림.ⓒ최선영

할머니 품에 쏘옥 안기는 민우와 현우에게 입맞춤을 하며 할머니도 많이 기뻐합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가족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동서 민우 현우가 그새 또 많이 큰 것 같네”

“네 하루하루 자라는 게 정말 눈에 보여요”

“쌍둥이 녀석들 키우느라 정말 고생이 많다... 그래도 저렇게 키워놓고 보니 좋지?”

“네~이제 둘이 손잡고 유치원도 가고... 정말 어릴 때는 힘들었는데 이젠 훨씬 편해졌어요”

아침식사를 끝내고 명절 음식을 준비합니다. 단출한 식구에 제사도 없지만 이것저것 늘 종류대로 음식을 만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명절 음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엄마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엄마~ 할머니가 영화 보고 싶다고 하셨어”

전을 굽는 엄마 옆에서 밀가루를 묻혀 계란 옷 입히는 것을 도와주던 연희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합니다.

​“영화? 보고 싶은 영화 찾아서 틀어드리렴”

엄마는 어렵지도 않은데..라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영화관 가서 영화 보고 싶다고 하셨어”

“어머 그래?”

“응 저번에 tv 보다가 아이 캔 스피크 영화 홍보하는 거 보고 나도 영화관 가서 영화 보고 싶다며 할아버지께 말하는 거 들었어”

“추석이라 영화관 복잡하지 않을까? 지나고 한 번 가야겠네”

“아니 할머니는 명절 때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 할아버지랑 데이트할 때도 영화관은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하시며”

“형님 요번 추석에는 우리 다 영화 보러 가야겠어요”

민우 엄마가 웃으며 말을 합니다.

“그래... 명절 선물이라고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해드리고 그랬는데... 아버님 어머님이 원하시는 걸 해드리는 게 진정한 선물이 되겠지”

연희 엄마도 웃으며 말합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tv로 봐도 되지만 그게 다르잖아요 느낌이...할머니가 그때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좀 짠... 했어요”

“어머 형님~ 우리 연희가 이렇게 많이 컸네요 아휴 예뻐라~ 저도 이런 딸을 낳았어야 하는데...”

이제 중학생이 된 연희는 정말 어른이 다 된 것처럼 할머니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버님 어머님 내일은 아침 먹고 영화 보러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죠?”

“아니 갑자기 웬 영화냐... 네 어머니 몸도 불편한데 집에서 보면 되지”

할아버지는 할머니 눈치를 보며 말합니다.

“불편하기는요 저희들 다 있는데... 명절에 영화관 안 가본 지 너무 오래돼서 저희들도 가고 싶고 아버님이 젊으셨을 때 어머님 모시고 데이트하실 때도 영화관은 못가 보셨다면서요. 저희 다 있을 때 가면 좋잖아요”

“아휴 괜스레 불편하게... 너희들끼리 다녀오렴”

“할머니~전 할머니랑 한 번도 영화관 못 가봤잖아요 같이 가요”

연희가 할머니 팔을 잡으며 졸라댑니다.

할머니는 못이긴 척 웃어 보입니다.

“펜션 예약했는데 갑자기 웬 영화?”

연희 아빠는 조용히 연희 엄마에게 묻습니다.

“영화 보고 가면 돼요 어머님이 영화관 가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 연희가 듣고 얘기하더라고요”

다음 날 온 가족이 영화관을 향합니다.

지체장애 1급인 할머니의 휠체어를 할아버지가 밀어주며 젊을 때 데이트하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예전에는 내가 당신 번쩍 안아주고 그랬는데... 미안해요”

“당신도 참... 그때 많이 해줬으니 이제는 못해줘도 괜찮아요 제가 평생 당신에게 빚진 마음인데...”

영화관에 도착한 가족이 표를 끊으려 합니다.

민우와 현우는 엄마와 애니메이션을 보기로 하고 다른 가족들은 아이 캔 스피크를 봅니다.

장애인과 동반 1인까지 할인되는 혜택을 받고 좌석을 보는데 장애인석은 맨 앞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맨 앞자리 장애인 석을 민우 아빠가 달려가 확인해 보았습니다.

“맨 앞자리는 보기 너무 불편해”

예상대로 맨 앞자리에서 보기에는 너무 불편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영화관에 간 할머니가 만난 계단 그림. ⓒ최선영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서 일반석에 앉기로 하고 표를 끊었습니다.

계단이 있어 연희 아빠와 민우 아빠가 양쪽에서 휠체어를 들어 올려 들어가서 의자에 앉히고 휠체어는 접어서 맨 뒤에 세워두었습니다.

“얘들아 괜히 왔나 보다... 영화관이 예전하고 다르게 많이 좋아졌다고 해서 휠체어 타고 와도 불편하지 않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자식들을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괜찮아요 이런 것도 다 추억이죠... 그런데 어머니는 저희가 모시면 되지만 이렇게 도와줄 보호자 없이 영화 보러 오는 장애인분들은 제일 앞자리에서 보셔야 하는데... 영화 보고 나면 목이 많이 아플 것 같아요”

연희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말합니다.

“차라리 할인 혜택을 안 해주더라도 불편함 없이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게 더 좋을 텐데...”

연희도 시무룩한 얼굴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불편하면 집에서 보면 되지 왜 굳이 영화관 나와서 말이 많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 일부이겠지만...”

연희 아빠도 표정을 굳히며 말합니다.

“보여주기식 편의 시설... 진정한 배려는 불편함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그 불편함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법으로 장애인 좌석 만들라 하니까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 몇 개 만들어놓고 법대로 했다고 말하지 말고..."

아직 어린 중학생 연희의 어른스러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는 가족들 덕분에 난생처음 영화관에서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가족여행을 가는 내내 할머니는 영화 이야기만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미처 생각을 못해서 미안하구려...”

할아버지는 좋아하는 할머니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가고 싶으셨으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 다음 설에도 또 가요”

민우 아빠도 짠... 한마음을 달래며 말합니다.

“아니다... 이제 됐어 네 아버지가 젊을 때는 힘이 좋아서 나를 업어주고 안아주며 오만 곳을 다 다녀서 장애인이라고 못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관은 용기가 나질 않더구나​. 그때도 영화 보고 싶다고 말하면 저 양반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 줬겠지만 영화관은 특히나 많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스레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에만 담아두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편하게 갈 수 있겠다 싶어 더 나이 들기 전에 꼭 한 번 영화관에 가보고 싶어서.

지난번 네 아버지한테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였단다​. 데이트할 때도 못 가본 영화관... 너희들과 함께 가서 보고... ​정말 좋구나. 이젠 집에서 볼란다 한 번 가봤으면 됐지“

할머니는 소원성취했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보냅니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장애인 편의 시설에 대해 생각하는 연희 그림. ⓒ최선영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연희는 누구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장애가 있는 분들이 불편한 시설이나 장애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환경이 아닌 것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이 작은 일이 할머니에게는 꿈이었다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 작은 일도 이런데 더 큰일들 앞에는 더 많은 불편을 느끼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늘 할머니 옆에서 함께 하며 할머니를 잘 도와드린다고 생각했는데...아직 많이 모자라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희는 다음 명절에도 할머니랑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다음 명절에는 할머니가 조금은 덜 불편을 느끼며 함께 영화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애를 가진 할머니가 영화관 가는 것이 꿈이 아닌 일상이 되는 그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연희에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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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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