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들. ⓒ최선영

이른 아침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밥 한 술 뜨다 말고 문득 바라본 아버지의 얼굴에 어제 없던 주름 하나가 보입니다

뜨거운 볕에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검붉은 색이 두껍게 덮여져 있습니다

“넌 꼭 네 형처럼 선생이 되거라”

아버지는 그늘 한 점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는 농사일을 막내아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으셨는지 입버릇처럼 선생이 되라고 합니다

가난이 주는 쓸쓸한 공기를 자식에게는 마시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소를 팔고 논을 팔아가며 뒷바라지합니다

“아버지의 땀으로 공부하고 그 손에 수고로 밥 먹고... 내가 자라는 만큼 아버지는 작아지시는구나...”

분명 어제는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 본 아버지의 이마에 또 하나의 선명하게 그어진 주름이라는 삶의 흔적을 보며 그는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아버지의 바람처럼 그도 국어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교사가 되면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이 매끈하게 펴질 것 만 같았습니다

어머니 손을 만지는 아들의 손. ⓒ최선영

어머니와 이별하던 12살의 봄..

잔인한 향기가 그의 마음을 그늘지게 하는 계절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그에게서 멀어지는 차가운 시간 속에 온기를 잃어버린 막내아들의 작은 손을 아버지가 잡아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환하게 웃는 법이 없습니다 형도 누나도 그도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더해지고... 덤덤해질 법도 한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그리움 그대로 그냥 눌러 담고 미소는 접어둔 체 서로를 토닥여주며 살았습니다

문득 그 봄이 생각날 때면 마음 한구석에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 사이로 그리움의 서늘한 바람이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책을 펴고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그 서늘한 바람을 피하곤 했습니다

“나는 책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아버지는 이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지...”

아버지 바람대로 교사가 되면 잊고 살았던 미소를 찾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립대학교 사범대는 등록금의 부담이 덜했고 졸업하면 바로 교사로 발령이 나던 때라 국립대학교 사범대를 응시했습니다

당연히 주어진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길은 그를 비켜가버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 뒤를 이어 농사를 지어야 하나? 아... 아버지...”

아버지가 실망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는 그에게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형이 말을 건넵니다

“특수교육과를 가보면 어떻겠니?”

형의 말에 농사를 짓기 싫다는 단순한 생각과 아버지 바람대로 교사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라는 기대감으로 특수교육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장애 아동을 지도하는 일인 줄도 모른 체 우연히 들어선 그 길이 그가 걸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입니다

장애 아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몇 년간은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그들과 부딪히고 뒹굴며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어렵게 느껴지던 것들이 익숙해지게 되었고 선생님의 손길을 항상 필요로 하는 아이들.. 무엇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들...

그가 기울이는 수고만큼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즐거워지는 것을 볼 때 그들로 인해 그는 행복을 느낍니다 그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라는 확신이 드는 이유입니다

특별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제자. ⓒ최선영

매일매일 행복을 선물하는 아이들... 특별한 사명감 없이 시작했어도, 남다른 사랑이 없어도 영혼이 맑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보람을 느끼게 하고 어디서 샘솟는지 모르는 사랑이 흘러넘치게 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픈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장 훌륭한 치료자는 아파본 사람입니다 마음을 맞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멍든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불편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매일 아이들을 만나고 함께 합니다

중증중복 장애 아동이 대부분인 학교에 자폐아동도 몇 있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2년째 되던 해 자폐 아동 문정이가 학교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살며시 두드리려고 다가가던 중에 무작정 나가버린 문정이를 기다리는 이틀...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진작 마음을 잘 어루만져 주지 못한 것이 괴로웠고 문정이를 무사히 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을 보고 어루만져 준 사람은 문정이 어머니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탓이 아니에요... 우리 문정이 아무 일 없이 돌아올 거예요"

​문정이 어머니의 위로는 그를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다듬어주었습니다

이틀 만에 돌아온 문정이를 안아주며 다시는 나가버리는 일 없도록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옥 같은 이틀의 시간은 특수학교 교사로서 조금 더 깊은 마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문정이를 생각합니다 그날의 그 다짐을 문정이를 기억할 때마다 다시 꺼내봅니다

3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하며 장애 아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동화였던 '날아간 작은 새'의 모티브가 되었던 태영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게 저려옵니다

근이완증 태영이는 유난히 말고 깨끗한 아이였습니다

늘 새가 되고 싶어 했던 태영이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났지만 늘 그의 마음에 살아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 아낌없는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에 사랑을 미루거나 조금 남겨두지도 말고 지금 이 아이들과 마주하는 이 시간에 모든 사랑을 다 담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정이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하나 되는 교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태영이는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돌보는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소중한 것들을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우고 있다는 것에 그는 늘 감사합니다

“거창한 사명감이 없어도 특별한 사랑을 준비하지 않아도 함께 하며 유리같이 투명한 아이들의 영혼을 보고 뒹굴고 품에 안아주다 보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참 어려울 것 같은 말을 그는 쉽게 합니다 사랑하면 쉬워지나 봅니다

아이들을 담은 글을 쓰고 여행에서 얻은 아름다운 것들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어 늘 고민합니다

1년 전부터 배우고 있는 그림... 그는 새하얀 도화지에 아이들을 담습니다

반 학생들을 그린 그의 그림. ⓒ최선영

아름다운 아이들의 미소를 그는 따듯한 마음으로 그립니다 아이들의 미소가 그의 손끝에서 빛이 납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려준 자신의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막내아들의 졸업식에 와서 학사모를 쓰고 함박웃음을 보이며 흐뭇해하시던 아버지는 그리워하던 어머니 곁에서 주름 없는 매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실 것 같습니다

​아픈 시간이 밑거름이 되어 아이들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그를 보며 어린 막내를 두고 먼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도 미안한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고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학생을 안아주며 활짝 웃고 있는 그. ⓒ최선영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배려의 시작이다”

31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생각을 바꾸는 배려를 시작하게 한 아이들에게 그는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얘들아 고맙다 너희들이 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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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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