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어에는 음성언어, 문자언어 그리고 비언어를 포함한다.

여기서 비언어란 음성이나 문자처럼 직접적이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표정, 몸짓 등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나쁜 것을 알 수 있고 위치나 사물을 가리킬 때 손을 이용하는 몸짓도 비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비언어는 독단적으로 사용할 경우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거나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음성언어나 문자언어와 함께 사용할 경우 의사소통을 더욱 확실하고 풍부하게 해준다. 바디 랭귀지(language)라는 말이 있듯이 비언어는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매우 유용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 비언어는 큰 의미가 없다. 어떤 경우 비언어는 우리가 상대와 의사소통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음성으로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인다든지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어떤 사물이나 방향을 물을 경우 ‘이쪽’, ‘저쪽’ 등의 지시대명사와 함께 손짓을 하기도 하는데 정안인에게는 그런 표현이 아무 문제없겠지만 손짓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는 이것이 무엇인지, 저쪽이 어느 방향인지 알 길이 없다.

정안인에게 비언어는 시각이나 음성 등의 청각적 자극과 함께 동시다발로 상대에게 전달되지만 시각장애인은 역으로 음성이나 소리로 비언어를 연상한다. 사물을 볼 수 없는 대신 촉각을 이용해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처럼 음성이나 소리를 통해 상대의 비언어를 이미지화 시키는 것이다. 가령 아이의 웃음소리가 ‘낄낄’하고 나면 입술을 샐쭉이며 웃고 있다고 연상하며 ‘하하’하고 큰소리로 웃으면 아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눈매까지 웃고 있는 표정을 연상하는 것이다.

며칠 전 친정엄마와 딸아이 그리고 나 이렇게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 손녀를 보며 이것저것을 물으시는 친정엄마에게 딸아이는 손안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의 턱을 들어 올리며 상대방과 이야기 할 때는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거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친정엄마가 놀라서 물으셨다.

“얘가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니?”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할 뿐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딸아이의 경우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할 경우 소리가 폐쇄적으로 울리게 되는데 나는 그 차이를 느끼고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실명 후 자립재활교육을 받을 당시 알게 된 선생님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분은 30대 후반의 미혼 남성이었는데 교육 첫날 내 목소리를 듣고 “연예인 000씨를 닮았네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기는 하지만 전맹이신 선생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교육 종강 때 술자리를 하며 선생님께 넌지시 물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성을 만날 때 외모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전혀 보지 못하는 남성 시각장애인들은 이성의 어떤 부분에 호감을 느끼나요?”

“당연히 외모죠. 하하”

선생님의 말인즉슨 상대의 목소리를 통해 얼굴의 윤곽이나 전체적인 이미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우리 몸 자체가 하나의 악기와 같다는 말처럼 음색, 발성, 울림, 비음 등으로 눈이 아닌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 것이다. 이분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음성이나 소리로 비언어적 행동을 추론하고 이미지화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장애가 있으면 으레 보지 못하겠거니 하고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시댁에 갔을 때였다. 출타하고 돌아오신 아버님이 내가 있던 방으로 들어와 무언가 찾는 듯 하시더니 어느 순간 옷을 갈아입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안해진 나는 더듬거리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때 아버님의 한 말씀.

“괜찮다. 뭐 상관있냐?”

아버님의 말씀처럼 당신이 완전히 벌거벗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며느리기에 아버님의 입장에서는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럽다는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나 역시 무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소리와 동시에 눈이 아닌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에 나는 무안해졌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데 방향을 가름해보니 욕실이었고 문이 열려 있는지 소리는 꽤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수돗물 떨어지듯 ‘콸콸’이 아니라 ‘쪼르륵’하고 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소변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도 아버님이셨다. 정안인이었다면 훤히 다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아버님은 문을 열어놓고 볼일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분명 그 거리에 내가 앉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아버님은 매우 경우 바르시고 깔끔한 성품이시다.

평소에도 책이며 신문을 항상 읽으시고 관심 있는 내용은 스크랩까지 하시는 나름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이시다. ‘가족이니까 뭐 어때?’하는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셨다고 생각하기에는 예전과 사뭇 다른 행동이셨다.

혹자는 아버님의 이런 행동을 머리에 그리지 않으면 될 텐데 괜히 떠올린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정안인들은 시선이 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시선이 닿았는데 보기 싫다고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차단할 수 없다. 보기 싫으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우리에게 소리가 그런 의미이다. 즉, 시각장애인들은 소리로 보는 것이다. 소리가 들리면 자동적으로 이미지화되고 그게 싫으면 소리를 차단해야 한다.

우리들의 비언어적 행동에는 상대에게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주는 것들이 있다.

며칠 전 딸아이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딸아이가 내 귀에 대고 살짝 속삭인다.

“엄마, 웃지마. 기사아저씨 콧구멍 후비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아무렇지 않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각장애인 앞에서는 예외이다. 보지 못하고 소리가 나지 않아서 스스로 이미지화 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사실 누구나 코도 후벼야하고, 이빨에 이물질이 끼면 그것도 후벼 빼야하고, 난감한 부분이 간지러우면 그것도 처리해야 한다. 이런 행동이 상대에게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준다고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이 없는 곳이나 알지 못하게 은밀히 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필자처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시야가 제한적으로 좁을 뿐 부분적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도 많다.

이런 점들을 염두하고 시각장애인을 대할 때에도 정안인에게 대하듯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설혹 필자처럼 전맹이라 하더라도 소리로 본다는 점,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작은 소리에 민감하다는 점 등을 염두 하여 행동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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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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