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 그림 ⓒ최선영

푸른 바다 내음의 짙은 향이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저녁노을 앞에서

어렴풋이 기억되는 갈매기의 요란한 언어들을 떠올려봅니다

오래전 기억 속에 있는 그들의 언어는 떠오를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희미한 소리로 기억 저 너머에서만 머물고 있습니다​

출렁이는 파도들의 속삭임에 대한 추억과 함께 그는 이번에는 미술학원을 들어서며 선생님을 향해 방긋 미소 짓는 5살 꼬마 녀석의 모습을 기억해냅니다

5살 어린 꼬마 녀석은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그럴듯하게 자동차를 그리며 이 멋진 차에 예쁜 여자친구를 태워 바닷가를 달릴 행복한 꿈을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

멋진 그림을 들고 집으로 뛰어가 반겨주는 엄마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엄마~ 아빠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서 이 차에 엄마처럼 예쁜 여자친구를 태워서 달릴 거예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멋있고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5살 꼬마는 그렇게 소박하고 예쁜 꿈을 그립니다

"따르릉~~"

"여보세요"

"아빠~"

"어이쿠~우리 아들~"

전화가 오면 쪼르르 달려가 전화를 받던 그 꼬마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원인을 알 수없는 병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합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던 그 아이는 전화벨 소리가 희미하고 멀게 들립니다​

"관찬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심장은 불길에 타버린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들었습니다

"관찬아 아빠가 사랑한다..."

아빠의 전화를 누구보다 좋아하며 받아들던 그는 아빠의 이 사랑고백을 잘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청각 중복 장애라는 생소한 이름 앞에 꿈을 담고 사랑을 쏟으며 키우던 아빠 엄마는 좌절을 생각할 여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장애라는 불청객 앞에 그들은 아들을 위해 기운을 차려야 했고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잘 보이고 잘 들리던 평범했던 그가 새롭게 만난 어둡고 먹먹한 세상은 ​8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모님은 특수학교 대신 일반학교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장애인을 위한 학교에서 생활했다면 조금은 편안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부모님은 세상에 나가 어우러져 살려면 세상 속에서 자라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그의 학창시절은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관찬이는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도 많았지만 부모님의 응원과 사랑을 받은 관찬이는 장애인이라는 낯선 삶을 낯설지 않게 살아내려 했습니다

씩씩하게 친구들을 바라보는 관찬 그림 ⓒ최선영

해보고 싶은 것은 포기하지 않는 씩씩한 어린이였습니다

좌절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상황을 이겨나가려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 반장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나 이번에 꼭 반장하고 싶은데 뽑아주면 정말 우리 반을 위해 열심히 할게 꼭 좀 뽑아줘"

관찬이의 열 번째 생일이었던 반장선거일은 관찬에게 학급반장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큰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했지만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관찬이는 남들과 다른 자신의 커다란 벽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칠판 글씨도 잘 보이지 않으니 회의 진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반장의 도움을 받으며 관찬이는 한 학기 동안 반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마 그때 관찬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누군가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것 같습니다

모두가 관찬이를 도와주는 착한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관찬이는 듣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관찬이를 놀리며 괴롭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큰소리로 욕을 하거나 놀려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체육시간이었습니다

​축구를 아주 많이 좋아했던 관찬이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며 마음껏 공차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축구를 하다 관찬이 편이 지는 날에는 모두 관찬이 탓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관찬이는 체육시간 교실에서 책을 읽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시간이 관찬이 가 공부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 주어진 삶에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관찬이는 배웠습니다

관찬이는 외롭고 힘든 시간을 통해 책이라는 친구를 얻었고 그 친구를 통해 성실하게 공부하고 인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책을 보며 공부하는 관찬 그림 ⓒ최선영

수업시간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고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찬이는 혼자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다른 친구가 1시간을 공부하면 관찬이는 2시간 3시간을 해야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나쁜 생각을 할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며 응원하는 부모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 더 많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선생님과의 인연 또한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 진학을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이 잘 되어 있는 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늘 혼자 공부해야 했던 그에게 ​문자통역도우미까지 붙여주어서 교수님의 강의를 다른 학생들과 같은 조건으로 듣게 되었고 ​장애가 있어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생활하고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축구부 동아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축구... 동아리 친구 선배들은 그와 함께 달리고 뛰며 그를 배려해주었습니다

그에게는 푸른 잔디밭의 달림을 통해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학교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조교로 근무하며 장애인 당사자로서의 권리 그리고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장애인이 된 것... 인생에 결코 우연은 없어... 아마 내게 주어진 내 삶에도 분명 뜻이 있을 거야..."

그의 생각대로 그에게 맡겨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들을 이루어가기 위한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신한금융그룹과 한국장애인재활협회가 주관하는 '장애청년 드림 팀 6대륙에 도전하다'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팀을 이루어 연수를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조장을 맡은 '달팽이 날다'팀은 그해 최우수팀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시청각 중복 장애에 대한 복지와 서비스 전문화된 체계에 대해 배우며 우리나라와 다른 현실에 많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관찬 그림 ⓒ최선영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좋은 점들이 빨리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는 차별이 아닌 차이,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는 말을 늘 들려줍니다

그의 활동을 통해 많은 어린 학생들은 장애인에 대한 시선에 변화를 주고 있고 그 학생들이 어른이 되는 머지않은 미래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가 어렵게 배운 첼로를 강의가 끝나고 들려주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듣지 못하는 그가 첼로를 연주한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놀라워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 또 다른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오랜만에 부모님이 계신 푸른 바다 내음 가득한 고향을 찾아 이제는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파도의 출렁임과 갈매기들의 요란한 언어들을 느끼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관찬 그림 ⓒ최선영

"만약 내가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는 생각합니다 장애가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시청각 중복 장애라는 쉽지 않은 삶이지만 그런 쉽지 않은 삶이었기에 얻게 된 성실함과 건강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는 그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이 장점은 늘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 준 부모님과 그를 응원해준 선생님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출렁이는 파도소리 그리고 아빠 엄마의 "관찬아~"하는 부드러운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을 다시는 들을 수 없고 그들의 모습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는 없고 그 모든 것들이 아주 많이

그립지만 그 희미한 기억을 추억하는 시간을 즐기며 더 큰 내일의 꿈을 위해 오늘 더 열심히 살아내 보겠다고 다짐하며 미소 지어봅니다

​그는 시청각 중복 장애라는 조금은 낯설고 많이 불편한 장애를 안고 살아가지만

강사로...

기자로...

첼로를 연주하는 연주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며 꿈을 이루고 바라는 것에 도전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장애인으로 비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그가 느꼈던 차별에 대한 것들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변화시켜 나갈 그의 내일을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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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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