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을 향해 걷고 있는 현석. ⓒ최선영

가로등 불빛 아래 긴 그림자가 걷고 있습니다. 그의 걸음은 무겁고 거칠었습니다.

터벅터벅 길을 걷던 그는 그를 따르는 짙은 그림자와 함께 독서실이라고 쓰여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파트와 주택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독서실 안은 낮은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조용했습니다.

적막함 마저 느껴지는 그곳에는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가방과 함께 그의 빈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책상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고개를 책상에 묻어버린 채 두 눈을 감아 버립니다.

​세상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은 듯 그는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해봅니다. 한참을 세상과 분리시키며 잠을 청하던 그에게 누군가 살며시 다가옵니다.

학교 친구 노민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립니다. 몸은 그대로 엎드린 채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그에게 노민이 휴게실로 나가자는 손짓을 합니다.

둘은 말없이 휴게실로 나와서 컵라면과 음료수를 들고 자리에 앉습니다. 노민이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고 있는 동안 그는 물끄러미 건너편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삼각김밥을 먹고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봅니다.

세 명의 여학생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현석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뜨거운 컵라면을 들고 오던 노민이 현석의 눈을 따라가며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현석은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립니다

​컵라면을 먹는 내내 현석은 그 여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주고 또 주었습니다. 그러다 현석이 노민에게 말을 꺼냅니다.

"쟤네들 언제부터 여기 온 거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네가 웬일이냐? 여자애들한테는 도통 관심도 없던 녀석이~" 노민은 현석의 뜻밖의 관심사에 재미있는 듯 벙글벙글 웃어댔습니다.

"관심이 아니라 안 보이던 애들이 보이니까 그냥 물어보는 거지..."

"네가 언제 안 보이는 애들 왔다고 그냥 물어본 적 있냐고... 하하" 노민은 여전히 벙글거리며 현석을 놀리 듯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합니다.

​"야~관둬 그냥 물어본 거 가지고" 현석은 컵라면을 먹다 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노민은 그제야 벙글거리던 헛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현석에게 앉아보라며 말을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보라와 친구들. ⓒ최선영

"왼쪽과 중간은 몇 달 전부터 나왔던 애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쟤는 오늘 처음 왔어, 쟤는 다리가 좀 불편한가 봐"

"나도 알아 옆에 클러치 있잖아~"

퉁명스러운 현석의 말에 노민은 관두라는 식으로 자세를 비틀며 현석과의 시선을 피해버립니다.

​여학생들이 일어나 다시 자리로 돌아갑니다. 노민이 컵라면을 다 먹고 현석에게 자리로 가자고 했지만 현석은 그냥 휴게실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12시...

여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나옵니다

현석은 재빨리 자리에 돌아가 가방을 챙겨들고 여학생들의 뒤를 따라 독서실을 빠져나옵니다.

노민은 덩달아 현석을 쫓아 나와 현석에게 "갑자기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쉿 조용히 해" 현석이 조용하라고 퉁퉁거립니다

​두 여학생은 클러치를 짚은 친구를 아파트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 나옵니다.

"보라야~내일 봐"

"응 얘들아 고마워 잘 가~"

현석은 그 여학생의 이름이 보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라... 보라... 보라..."

현석의 우물거리는 말에 노민은 뭐라고 하는 거냐며 어깨를 툭~칩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가 끝나자 현석은 서둘러 독서실로 가자며 노민을 재촉합니다.

​"공부도 안 하는 녀석이 왜 이렇게 급하게 서둘러?"

노민은 평소와 다른 현석의 재바른 몸놀림에 놀라워하며 퉁명스레 말을 던집니다. 현석은 노민의 말에 대답도 없이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가버립니다.

​독서실에 도착한 현석과 노민은 가방을 자리에 두고 휴게실로 갑니다. 한참을 출입문만 바라보던 현석은 독서실 관리 형에게 여학생들 아직 안 왔냐고 물어봅니다.

아직 여학생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에 현석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물끄러미 출입문을 바라봅니다.

"야~ 너 설마 어제 본 그 애들 관심 있냐?"

현석은 노민의 말에 대구도 없이 출입문만 바라봅니다

​노민은 현석을 두고 자리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합니다 기말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노민은 마음이 바빴습니다.

현석의 기다림을 알지 못한 채 보라와 친구들은 그날 독서실에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도 현석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서실을 향합니다. 막 독서실 문을 들어서는데 휴게실 쪽에 보라와 친구들이 보입니다.

현석은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처럼 반가움에 그만 그들에게 달려가 어제 왜 오지 않았냐고 말을 건넵니다.

동네 짱으로 통하는 현석의 반응에 보라 친구들은 몸을 흠칫거리며 표정을 굳힙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라는 친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냅니다. 그리고 어제는 보라의 몸이 아파서 그냥 집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합니다. 현석은 아프지 말라는 짧은 말을 어색하게 남기고 자리로 갑니다.

"보라야 넌 잘 모르겠지만 쟤 일진이야"

"얘들아... 그건 편견이야 그냥 공부를 안 해서 못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많이 놀겠지...그런 걸 가지고 일진이라고 하면 안 돼"

"그게 아니야 싸움도 엄청 잘하고... 아무튼 무서운 애야"

친구들은 보라에게 단단히 조심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날 밤

​현석은 보라가 독서실을 나오자 뒤따라 나옵니다.

보라를 바라보는 현석. ⓒ최선영

"가방... 들어줄게..."

현석이 없는 용기를 내어 겨우 말을 건넸는데...

보라 친구들은 괜찮다며 보라의 가방을 손에 들어 꼭 쥐어 보입니다.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노민이 아이들 곁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현석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며 변명을 대신합니다.

노민은 전교 1,2등을 하는 우등생이었기에 보라 친구들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깁니다. 가만히 서 있던 보라가 현석을 바라보며 말을 건넵니다

​"이름이 현석이야? 가방이 많이 무거워... 들어주면 좋겠는데..."

​​보라는 친구들에게 가방을 건네받아 현석에게 줍니다. 노민과 보라 친구들은 한 걸음 앞서가고 현석과 보라는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우정은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서실에 잠자러 오던 현석은 보라와 함께 하면서 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런 현석의 변화에 노민은 현석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습니다. 때로는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하고 가끔은 돌머리라고 구박을 해가며 노민은 현석의 공부를 도왔습니다.

​노민과 보라 친구들은 현석의 변화가 몹시도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 변화의 중심에 보라가 있다는 것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현석아... 보라가 왜 좋아?"

"누가 좋대? 그냥..."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리는 현석을 노민은 가는 눈웃음으로 놀리듯 바라봅니다.

​"엄마 생각나서..."

현석의 그 한마디에 노민은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현석이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청각장애이던 현석의 어머니는 음주운전으로 갈팡질팡 거리며 몰아쳐 달려오던 자동차 소리를 듣지 못하고 현석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고 현석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각장애 어머니를 마음 한편 부끄러워하는 정말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죄송함과 중학교 들어와서 사춘기...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면서 한 번도 어머니를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몹시도 부끄럽고 미워서 자기를 학대하듯 늘 상위권이던 우등생이라는 자리도 내던져 버리고 그렇게 중3 고1 그 중요한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현석이 보라를 처음 본 독서실 휴게실에는 보라의 예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웃고 있는 보라.ⓒ최선영

"저애는 어떤 마음으로 살기에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잠시 뒤 현석의 시선에 들어온 보라의 클러치...

"저 아이의 엄마는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밝게 키웠을까..."

그리고 소곤거림 속에 현석의 귀에 크게 들렸던 한마디...그저께 엄마 기일이었다는 현석의 심장을 쿵-내려앉게 했던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석은 보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현석은 보라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현석이 보라에게 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함께 밤을 지내던 친구들 틈에서 나오기 위해 많은 매를 맞기도 했고, 죽을 만큼 큰 고통도 겪어야 했지만 현석은 그 모든 것을 참아냈고, 현석을 잡으려던 친구들도 현석의 결심을 더 이상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길에서 걸어 나온 현석은 친구들과 함께 했습니다. 다섯 명의 우정은 길고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함께 대학입시 준비를 합니다. 노민과 보라 친구 영은은 목표대로 S대를 나란히 들어갔고, 보라와 보라 친구 민지도 원하던 Y대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현석은 목표한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하기로 합니다.

현석의 재수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보라와 친구들은 현석을 격려하며 또 때로는 돌머리라며 예전처럼 구박도 해가며 함께 했습니다.

그다음 해 현석은 자신이 목표했던 보라와 같은 대학인 Y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또 2년이 지난 지금 현석과 보라는 이제 우정이 아닌 사랑으로 그 색을 짙게 물들이며 아름다운 교정을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고 보라에게 이제껏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아주 많이 궁금했던 질문을 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힘들지 않았어?..." 어렵게 던진 현석의 말에 보라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합니다.

​"넌... 너도 힘들었지?... 나도 많이 힘들었어 늘 내 장애를 원망이라도 해야 해서원망의 대상을 찾다 보니 제일 가까운 곳에 엄마가 있었어... 늘 내 앞에서 죄인처럼 말도 크게 안 하는 엄마가 더 싫었고...내 감정의 찌꺼기들을 엄마에게 다 쏟아부었어. 엄마의 최고의 목표는 장애를 가진 딸이 밝고 아름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였어.

겉으로는 엄마의 목표를 이루는 것 같은 삶을 살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딸이 되었던 거지...그런데 엄마가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어... 그때 내 맘이 어땠는지 알아?..."

잠시 말문을 잇지 못하는 보라의 어깨를 현석이 토닥여 줍니다. 현석의 위로를 받으며 보라는 다시 말을 이어갑니다.

"1년간 엄마는 투병생활을 하셨고 난 세상에서 가장 착한 딸이 되겠다는 나 스스로와의 약속을 그 1년 동안 지켰어 그리고 엄마는 큰 숙제 하나를 남기고 떠나셨어... 장애를 가진 딸로 살기 힘들었을 텐데...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장애를 가진 엄마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딸도 장애아를 가진 엄마도 당당하게 살아낼 수 있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 보라고...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온 거야 글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켜보려고."

보라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현석은 환한 미소를 보내며 보라에게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을 내보입니다.

"보라야... 장애를 가진 엄마를 둔 자식은 어떨 것 같아?... 나 보라 너를 따라서 여기 들어온 것만은 아니야 사실은 나도 너와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들어온 거야"

활짝 웃고 있는 보라와 현석ⓒ최선영

그들의 사랑은 깊어졌고 그들의 꿈은 더 커졌습니다.

둘은 말없이 손을 꼭 잡고 하늘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보냅니다.

그들의 미소를 하늘나라에서 두 어머니는 그들의 사랑과 꿈을 응원하며​ 기쁘게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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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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