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이사하는 날, 공교롭게도 서른여섯 생일이다. 직원의 마음도 이렇게 분주한데, 대수 씨는 밤잠을 설치지 않았을까? 방안에 있던 짐과 옷을 담았다. 종이 상자 3개에 다 담겼다. 서른여섯 청년의 살림으로는 너무 가볍다. 1톤 트럭에 한가득 싣고도 모자랐으면…. 마음이 찡하다.

한솥밥 먹던 월평빌라 이웃과 직원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떡을 돌렸다. 감사 인사 겸 송별 인사를 했다. 누구는 잘 살라는 덕담을 건넸고, 누구는 선물을 건넸다.

8년 머물렀던 방을 정리하고 직원의 자가용에 이삿짐을 실었다. 월평빌라에서 자취방 ‘학당골’까지 3Km, 자가용으로 5분.

이사하고, 필요한 물건 사고, 시장 봐서 반찬 만들며 하루 종일 분주히 움직였더니 직원은 녹초가 되었다. 저녁밥 짓는 대수 씨는 여전히 생기 가득하다. ‘대수 씨, 잘 살아요. 파이팅!’ 「2016년 6월 5일 일지, 임경주. 발췌 편집」

이대수 씨가 서른여섯 생일에 자취를 시작합니다. 월평빌라 입주 8년 만에 독립합니다. 월평빌라 10년 역사에 여섯 번째입니다.

이대수 씨는 여덟 살 되던 해, 무슨 영문인지 부산 영도구 어느 시설 앞 길거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뇌성마비를 앓았고, 어렸을 때는 보조기가 있어야 걸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걷지 못하고 말 못하는 아이가 길거리에 혼자 남겨진 거죠. 가까운 시설에 잠시 머무르며 가족을 찾겠다는 게 지금까지 시설에서 지냅니다. 부모형제 소식은 아직 모릅니다.

지금은 보조기 없이, 서툴게 걷습니다. 양팔을 안팎으로 휘젓고, 걸음마다 휘청거리니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합니다. 오르막 내리막은 아주 위태하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설 때도 불안정합니다. 계단은 벽이나 손잡이를 짚고 오르내립니다. 말은 못 해도 질문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으로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자기 이름 정도는 쓸 줄 알고요.

2009년 6월 29일, 월평빌라에 입주했습니다. 그전에는 부산에 있는 복지시설 두 곳에서 살았습니다. 스물여덟 청년이었지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해 7월, 월평빌라 인근 아림고등학교에 전학했고, 2011년 2월에 졸업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모교를 찾아가 은사님을 뵙고 후배들을 만납니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자취방이 아림고등학교 정문 맞은편입니다.

월평빌라에서도 대수 씨의 신앙을 이어가게 도왔습니다. 인근 교회를 수소문하고 대수 씨와 방문하여 대산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지금까지 잘 다닙니다. 교회에서는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습니다. 예배당 신발장의 신발 정리는 대수 씨 몫입니다. 교회에서 메주 쑤는 날에는 간식 사서 가고, 서툰 발걸음 서툰 손짓으로 한몫 톡톡히 합니다. 교회 나들이, 절기 예배, 임직식 같은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심방이나 지나는 길에 대수 씨 집에 종종 들릅니다.

졸업 후에는 종이아트 학원에 등록해서 2년 정도 배웠습니다. 한때 한글을 배우려고 학원에 잠깐 다녔고요. 대수 씨의 굳은 몸을 조금이나마 유연하게 할까 싶어서 수영장에 등록해 3개월을 다녔습니다.

2013년 3월부터 경남도립거창대학 평생교육원의 도예교실에 등록해서 지금까지 다닙니다. 도예교실 회원은 한 번 등록하면 오래 수강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만 4년 다닌 대수 씨는 회원들과 아주 친하게 지냅니다. 회원들에게 인기가 많고요. 그도 그럴 것이, 개강식 종강식 때마다 대수 씨가 떡이나 음료수를 대접했습니다. 흙을 반죽하고 도기를 빗을 때, 유약을 바르고 구울 때, 완성된 도자기를 옮길 때, 회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 개강할 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고, 종강할 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겁니다.

언제 한 번은 도예교실 강사와 회원들이 대수 씨에게 여름옷을 선물했습니다. 강사는 본인 작품을 경매에 내놓고, 회원들이 작품을 샀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강사와 대수 씨가 옷 가게에 가서 직접 입어보며 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인사 잘하는 대수 씨를 위해 강사와 회원들이 마련한 이벤트였습니다. 지금까지 만 4년, 도예교실을 다니며 대수 씨와 회원들 사이에 있었던 정겨운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대수 씨의 인기는 월평빌라에서도 대단합니다. 인기만큼이나 입주자 자치회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2011년 월평빌라 입주자 자치회 총무, 2012년 선거관리위원장, 2013년 총무, 2014년 소식지팀장. 여기서 잠깐! 대수 씨는 말을 못합니다. 글이나 수를 모르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활동을 감당했을까요?

2011년 월평빌라 입주자 총회에서 당시 총무였던 대수 씨가 당해 결산과 내년 예산을 보고했습니다. 어떻게요? 대수 씨가 보고자 자리에 서자, 직원이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띄웠습니다. 대수씨가 지시봉으로 내용을 가리키면 직원이 대신 읽었습니다. 올해 수입과 지출 내역, 내년 예산을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총회 앞두고 어떻게 보고할지 의논했고, 궁리 끝에 대수 씨가 지시봉으로 가리키면 직원이 읽기로 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잘 볼 수 있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했고요. 글을 모르는 대수 씨와 대신 읽는 직원이 호흡을 맞추느라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이대수 씨를 지원하던 백성철 선생은 대수 씨의 총무 역할을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대수 씨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며 총무 역할 다하도록 애썼습니다. 예․결산 보고, 누가 했나요? 선거관리위원장, 총무, 소식지팀장, 매번 대수 씨가 잘 감당했습니다.

2014년 5월 2일, 대수 씨는 생애 첫 직장 ‘이해숙머리방’에 취업했습니다. 미용실 직원으로 채용되었지만, 미용실이 있는 3층 건물의 계단 청소가 주 업무입니다. 건물주가 미용실 사장님이고, 계단 청소하기로 계약했습니다. 계단, 창문, 난간, 출입문을 쓸고 닦습니다. 일주일에 이틀, 한두 시간씩 일합니다. 한동안은 시설 직원이 동행해서 거들었고, 요즘은 혼자서도 잘합니다.

대수 씨 걸음걸이를 봤다면 3층 건물의 계단 청소를 맡기는 게 불안했을 텐데, 사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채용했을까요? 사장님네 초등학생 아들이 대수 씨 청소하는 모습 보고 너무 놀라서 ‘아빠, 엄마는 마녀야. 아픈 삼촌한테 일 시켜.’ 했고, 중학생 딸은 엄마가 장애인 착취한다고 야단야단했다 합니다. 그만큼 불안해 보였습니다.

‘이해숙머리방’은 대수 씨 단골 미용실이었습니다. 이해숙 사장님을 미용실 사장님으로 먼저 만난 거죠. 그래서 사장님이 대수 씨를 잘 알았습니다. 인근 미용실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하는 월평빌라 입주자의 소식을 들어서 그 내용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리고 이전에도 몸 불편한 분이 계단 청소를 했답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겁니다.

맡은 일은 건물 계단 청소이지만, 미용실이 바쁠 때는 미용실 청소를 돕습니다. 차 마시고, 간식 먹고, 휴식하고, 회식할 때는 미용실 동료들과 함께합니다. 일 년 남짓 일하니 미용실 단골손님들도 대수 씨를 직원으로 알거니와 길거리에서 대수 씨를 만나면 알아봅니다. 한 번은 미용실 단골손님이 분식점에서 대수 씨를 만났는데, 분식점 주인에게 ‘미용실에서 일하는 총각’이라고 했다죠. 영락없는 미용실 직원입니다.

2017년을 맞으며 대수 씨와 대수 씨를 지원하는 임경주 선생님은 ‘자취’를 꿈꾸었습니다. 밥은 할 줄 알지만 반찬은 계란 프라이를 겨우 했고, 국은 엄두를 못 냈습니다. 전기레인지와 전자레인지를 서툴게 사용할 수 있지만 음식을 데우는 정도였습니다. 장애연금 20여만 원과 월급 8만 원이 고정 수입이었고, 서른여섯 청년의 살림은 종이박스 3개가 전부였습니다. 독립을 꿈꾸는 청년은 생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취는 무모한 도전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대수 씨와 임경주 선생님은 믿는 게 있는지 1월부터 자취방 알아보며 자취를 준비했습니다. 도대체 무얼 믿는 건지?

대산교회 목사님, 사모님과 자취를 의논했습니다. 자취방을 부탁했고, 자취 후의 생활도 부탁했습니다. 도예교실 강사와 회원들에게 알리고 부탁했습니다. 직장 사장님과 동료들에게 알리고 부탁했습니다. 다들 얼마쯤 걱정하면서도 ‘대수 씨는 잘 살 거야.’ 하며 응원하고 도왔습니다.

운명처럼, 우연인지, 모교 정문 맞은편에 자취방을 구했습니다. 직장 사장님은 ‘이삿짐은 밥솥이 먼저 들어가야 돼.’ 하며 미용실 잠시 닫고 밥솥 사서 건넸습니다. 밥 그릇 국그릇, 온갖 그릇은 도예교실 회원들이 손수 빗어 준비했고, 밥상 겸 교탁은 입주예배 때 목사님이 선물했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앞집 옆집 이웃들도 좋은 사람들입니다.

직장 다니며 동료들과 함께하고, 교회 다니며 교우들과 관계하고, 동아리 활동하며 회원들과 어울리고, 시내 오가며 이웃과 더불어 사니 자취가 불쑥 다가왔습니다. 발판이었고 힘이 되었습니다. 이대수 씨와 임경주 선생님은 이 사람들을 믿었던 겁니다. 앞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입주자를 사람으로 보고 사람답게 도우려 하니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 관계를 살리는 데 힘쓰게 됩니다. 입주자의 관계를 살리는 데 힘쓰다 보면, 사회 활동이 늘어나고 활동 반경이 넓어져서, 거처도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주자의 주거를 다양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주거 지원은 이렇게 입주자를 사람으로 보고 사람답게 도우려는 사회사업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주거 지원의 필요성, 관계 지원의 결과", <<복지요결>> <시설 사회사업>편, 2017

밥하고 요리하고 샤워하고 청소할 줄 알면 독립한다는데… 생존훈련은 독립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못 됩니다. ‘자취, 집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했죠. ‘자취, 밥보다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 이대수 씨를 지원하는 임경주, 백성철 선생님의 말과 글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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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현 칼럼리스트 ‘월평빌라’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줄곧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사회사업가가 일하는 이야기, 장애인거주시설 입주 장애인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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