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고 있는 그 그림 ⓒ최선영

발렌타인데이로 거리가 달달하던 2월

그는 초콜릿을 들고 거리를 걷는 다정한 연인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를 남기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 달달한 거리를 벗어납니다

그에게도 달콤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옆에 있던 8년 전 오늘은 그의 손에도 초콜릿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달콤했던 사랑은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를 몹시도 사랑했던 그녀를 그는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하던 그녀를 그는 곁에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서두르는 부모님께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그가 청혼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복학해서 3학년이 된 그는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그에게 결혼은 아직은 먼 이야기입니다​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그녀를 그는 먼저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이제 정말 네가 싫어 제발 좀 가라"

"갑자기 왜 그래... 나 기다릴 수 있다고..."

"나 다른 사람 생겼어... 미안..."​

그녀는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냉정한 말과 태도 그리고 그를 만나러 온 그녀 앞에서 서둘러

약속 있다며 달아나듯 가버리는 그를 보며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가는 뒷모습은 그의 아픔이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보낸 그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도록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녀를 보내고 8년...

​그녀를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 속에 비겁했던 자신이 후회스럽고 미웠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그가 그녀를 만났습니다 ​

카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서 보고 있는 그 그림 ⓒ최선영

부산 출장에서 카페에 들른 그는 그녀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에세이집이 카페 책꽂이 한편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습니다

책 표지를 본 그는 그림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글. 그림 한수지..."

한 장 한 장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그는 그녀의 글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책 중간중간 들어있는 그녀의 그림은 그의 시선을 오래도록 머물게 했습니다

"이런 글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부산에서 돌아와 그녀의 책을 사러 서점을 들렀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그녀의 책이 그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깊은 아픔이 느껴지는 그녀의 글에서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한수지... 나와 참 비슷하다..."

그는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지은이에 대한 별다른 소개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문예 창작과 한수지라고만 소개되어있었습니다

그 흔한 작가 사진 한 장 없이 단출하게 소개된 것도 그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가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동화처럼 쓰여 있습니다

그녀를 알고 싶어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철저히 그녀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깊은 아픔과 눈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책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그녀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이메일이었습니다

에필로그에 작가의 짤막한 인사말 맨 아래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이메일...

그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노트북을 펴서 메일을 확인하는 그 그림 ⓒ최선영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았다는 아주 간략한 글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메일 자체를 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메일을 읽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오해를 할까 봐 그는 더 이상 메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메일을 확인하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그녀에게서 온 메일을 보자 왠지 모를 설렘으로 그는 메일을 열어보았습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자신의 책을 좋게 봐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서울에 사는 이태준이며 부산 출장에 갔다가 카페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사서 꼼꼼히 보았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보냈습니다

그저 별 기대 없이 반가운 마음에 긴 답장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그녀도 조금 긴 답장을 하루 만에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주일을 함께 보냈습니다

많이 불편하다며 그는 그녀에게 카톡 친구가 되자고​ 제안했습니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그는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의 홈페이지 주소를 보내주며 그곳에 들어가면

그가 소속된 부서와 직책과 이름이 다 나온다며 확인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카톡 친구가 된 그녀와 그는 그가 출근하는 아침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매시간 시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에게 카톡을 보내고 있는 그녀 그림 ⓒ최선영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서로를 향해 달음질하던 그들은

그게 사랑의 시작인 줄도 모른 체 그렇게 서로를 향한 마음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가 마음에 점점 커지게 되자 "우리 좋은 친구가 되어요"라는 말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선을 그었습니다

"친군데 그럼 말 편하게 할까요? 나이가 몇이세요?"

그녀는 그보다 다섯 살 아래였습니다

"내가 한참 오빠네~ 이제 오빠라고 생각해"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그녀에게 보냈습니다

그녀도 그녀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목소리 듣고 싶네"

그는 그녀에게 카톡으로 번호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그에게 전화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가 그의 다가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친구라는 선을 그어버렸던 아직 그에게 말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말하려다 말기를 반복하며 그녀는 그에게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가 가진 말 못 하는 이유가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녀는 그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구하자며 스스로에게 선을 그었지만 그녀는 이제 그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제 그만 연락하자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하려 했던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하며 매일을 함께 했습니다​

전화를 하고 있는 그와 그녀 그림 ⓒ최선영

이러다가는 돌아갈 수조차 없을 것만 같았던 그녀는

그를 속이는 것만 같아 더 이상 이런 만남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그에게 처음처럼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긴 글 속에는 그녀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메일을 확인 한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것은 바로 그녀의 글과 그림이었다는 말을 하며

그는 오히려 더 그녀가 좋아졌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그녀를 토닥여주었습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의 잃어버린 마음의 열쇠를 그녀가 들고 나타난 것을 그녀에게 말하며 도망 가려는 그녀를 잡아주었습니다

서로에게 있는 그 외로움의 빈자리를 서로가 채워나가자며 말했을 때...

그녀도 그의 진실된 사랑을 고마워하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습니다​

​장미 향기가 온 거리를 아름답게 하는 5월의 끝자락... 그들이 만난 지 백일이 되는 날입니다

짧은 시간 매일같이 톡을 하고 전화를 한 그들의 사랑은 천일을 함께 한 것보다 더 깊어져 있습니다

​백일이 되는 날 그들은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가 그녀를 만나러 부산을 향합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은 그에게는 아주 많이 더딘 시간이었습니다

이미 마음은 부산에 가 있는데 열차는 아직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도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보고 또 보고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옷을 다른 것으로 갈아입어보고 그러다

다시 그 옷을 입으며 그를 기다리는 시간을 설렘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백일동안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설렘은 그들의 만남을 더 애틋하게 했습니다

백일을 매일같이 전화 와 톡을 했던 까닭일까요...

많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오래된 연인처럼 그들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입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그와 그녀 그림 ⓒ최선영

서울과 부산을 서로 오가는 그들의 사랑은 그 거리만큼이나 쌓여갔고

걸리는 긴 시간만큼이나 깊어져갔습니다

그는 그녀가 매일 매 순간 그리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것으로는 그의 그리움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수지야... 우리 이러지 말고 매일 보자"

청혼을 하고 한 달 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매일 함께 하는 그들은 매일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은 이제 열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자님인지 공주님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귀한 열매를 통해

그들의 사랑은 더 아름답게 꽃이 필 것 같습니다

5월의 싱그러운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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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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