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쯤의 일이다. 시각장애인 동료 중 자취를 하는 사람이 있어 그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형태 정도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잔존시력을 가진 동료였는데 평소 장보기나 간단한 요리 정도는 혼자 잘 하는 편인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활동보조서비스가 보편화 되어 있지도 않아 사소한 일들부터 하나하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며칠 전 장을 봐 왔고 마트에서 맥주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꺼내 마시라 했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날씨도 덥고 해서 냉장고를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맥주는 없었다. 다만 흔히들 알고 있는 탄산이 들어 있는 포도음료만이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포도음료의 모양을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캔의 크기나 생김이 맥주의 크기나 모양과 매우 유사하다.
형태 정도만 식별할 수 있는 잔존시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이 포도음료를 맥주인 줄 알고 잔뜩 사온 것이었다. 포도음료도 목을 축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그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더 나누다 돌아왔었다.
그냥 재미난 일화로 생각하며 웃어넘기기에는 무언가 씁쓸한 생각이 든다. 비단 포도음료와 맥주 뿐만 아니라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한 물건들은 얼마나 많을까? 샴푸와 린스, 스킨과 로션에서부터 감기기운이 있을 때 마시는 음료와 피로회복제, 소화제와 진통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또,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하려는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포도음료와 맥주의 일화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샴푸나 린스는 구분하지 못하여도 불편한 정도이겠지만 먹는 음식이나 의약품의 경우는 혼동할 경우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이미 많은 언론과 사람들을 통해 수차례 지적된 바 있다. 하지만 단 한가지도 개선된 것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의약품이나 건강식품 등에 복약정보 등을 점자로 표기하는 것을 의무화 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들은 그래도 캔음료 상단에 점자표기가 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자표기도 조금만 살펴보면 단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포도음료와 캔커피는 둘 다 점자로 그냥 음료라고만 표기되어 있을 뿐 이게 무슨 음료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나마 맥주는 맥주라고 표기되어 있어 나은 편이지만 어느 브랜드의 맥주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냥 목마르면 음료라고 표기된 걸 아무거나 사서 마시고, 술이 한잔 생각 날 때면 이 맛 저 맛 가리지 말고 그냥 맥주라고 표기된 것 중에 아무거나 사서 마시란 이야기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의류매장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곳에서 아무 옷이나 주면서 그냥 옷이 필요해서 왔으니 아무 옷이나 입으라고 하면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며 주는 대로 사서 올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와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많이 이야기 되었던 내용인데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점도 있다. 대부분의 제품은 사용 가능한 기간이 제한적이다. 특히 음식물의 경우는 그 유통기한이 길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다 기간이 지난 것들을 섭취하게 되면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유통기한에 대해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캔음료에는 그나마 종류만이라도 점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사서 최대한 신속히 먹는 것 말고는 특별한 대안이 없는 것이다.
자주 장을 보기가 어렵기에 가급적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용량의 제품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조차 대안이 될 수 없다. 최소한 제품의 이름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잔존시력을 가진 나도 유통기한은 방법이 없어 우유하나 마실 때에도 번번이 아내에게 이거 며칠까지 먹어도 되는거냐고 묻곤 한다.
유통기한은 제품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포장재의 제작시에 미리 인쇄할 수가 없어 대부분 생산 후 별도의 표기를 하기에 그 인쇄상태 등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고, 제품의 겉포장이 화려해질수록 식별은 더욱 어려워진다.
어쩌면 요즘은 활동보조인 제도가 잘 되어 있으니 그 사람들과 함께 장을 보면 될 일이지 왜 호들갑을 떠느냐며 그렇게 일일이 모든 상품에 점자를 표기하기도 어렵거니와 점자표기를 위해서는 단가가 올라가게 되는데 소수를 위해 왜 다수가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느냐고, 또 매번 다르게 표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은 방법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일단, 현재의 활동보조체계에서는 판정기준이 시각장애인에게는 맞지 않는데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배정받기도 어렵다. 특히 활동보조인과 24시간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사소한 일들 상당수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이게 단순히 소수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나 이런 이야기들은 하지 않겠다. 이러한 논리를 제외하고 생각해 보더라도 지금의 제품정보 표기방식에서는 많은 이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
특히 고령층에게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각장애인들이 그러하듯 물건의 구매와 사용에서 그 식별에 어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고령층 인구의 증가를 고려해 보더라도 이러한 제품의 정보표기방법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들 단 한번 만이라도 눈을 감고 자기 집 냉장고를 열어 보았으면 좋겠다. 과연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들이 여러분에게 안전하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모두가 불안하게만 느껴지는지. 이게 누군가에게는 일상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모든 제품의 정보와 유통기한 등을 점자로 표기해 달라는 게 무리일 수 있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이러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요즘은 간단한 QR코드라벨 하나 부착하는 것 만으로도 제품의 성분과 유통기한 뿐만 아니라 상세한 정보들 까지도 충분히 전달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시각장애인들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더욱이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일부 제품들은 포장 후 QR코드 스티커를 부착하여 그 원산지나 유통 경로 등을 알려주는 사례도 이미 존재한다. 이제 생산원가나 표기법 부재 등에 대해 핑계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방법을 모색해 보고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