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애인단체의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평소 좋아했다며,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은 너무나 실망했다며 호감을 가졌는데, 어찌 꿈도 없느냐, 왜 사느냐며 화를 내었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왜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런 에너지도 없이 건조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살다니 정말 실망이라고 말했다. 나를 허무주의자 정도로 보는 듯했다.

사실 나는 꿈이 없었고 지금도 꿈이 없다. 꿈이 없으니 잘못된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나만 장애인인 줄 알았고, 특수학교 같은 시설이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칠판도 보지 못하고, 공부도 전교 꼴찌였던 나로서는 장래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지로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냥 저절로 거지가 되겠거니 하였지 거지가 장래의 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장애인단체나 시설 종사자, 연예인, 봉사자 등이 장애인에게 꿈을 주겠다거나, 드림, 희망, 무지개 등을 이야기할 때에 가슴 속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주로 꿈을 말하듯이 꿈도 재활의 개념처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느 언론사에서는 장애인이 소풍을 간 행사를 두고 ‘장애를 극복하고 소풍을 갔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한 적이 있다. 어느 한 기사에서는 장애인도 꿈을 이루도록 소원말하기 대회를 했다고 소개했다.

발달장애인들이 자기주장 대회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결정권은 누구나 가진 권리인데, 왜 그러한 대회를 하는지 궁금했다. 누구나 밥을 먹고 사는데 밥을 먹어야 한다는 행사를 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한 대회로 외쳐야 하는 사회는 아직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다.

꿈이 없이 그냥 열심히 살면 안 되는 것일까? 희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꿈과 희망은 에너지고 기쁨이다.

그러나 꿈이 있기만 하면 다 행복할까? 지난 대선에서 4대강을 희망과 비전으로 제시했으나 그것은 꿈이 아닌 여러 가지 문제로 다가오기도 했다. 4대강을 대강해서 그렇다고 한다.

매번 선거에서 공약을 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가치를 주고 기대를 하지만 오히려 기만당하고, 현재의 질서만 파괴되는 경우도 많다. 꿈은 오히려 이용당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명분을 준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 삶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등은 꿈이라기보다 바램이고 소망이다. 소망도 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잘못하면 꿈은 꾸임이 된다.

꿈은 ‘몽’이라서 몽롱한 것일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개꿈도 있고 악몽도 있다. 또한 꿈은 목표이다. 그러나 목표라고 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목표가 꿈이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어느 직업재활사가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사업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꿈을 이야기하는 시혜적, 동정적, 단편적 말은 하지 않는다. 차원이 다르다. 실질적인 직업을 주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그래, 꿈이 없다고 나를 비난한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도 있으니 반갑다였고, 또 하나는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수준에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것 인가였다.

장애인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위정자나 정책 입안자가 사는 것이 어렵지만 꿈을 가지라는 위로로 들리고 나는 그러한 위로를 받는 대상이 된 기분이 든다.

드림 업, 드림 스타트 등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에 꿈은 참으로 많이 사용된다. 사과를 먹는 데에 맛있어서 그냥 먹고 싶어서 먹으면 되지, 먹음으로써 목표를 정하거나 효과를 생각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것은 주는 자의 마음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꿈이야기를 계속 듣는 대상자는 지겹거나 위선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꿈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현실에 당신이나 충실하거나 나에게 주려면 당장의 실질적 무언가를 달라고 말하고도 싶다.

꿈을 묻는 사람에게 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경험이 있어 대학총장이라고 둘러대었더니 다른 사람 입을 통해 그 나이에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고 비난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외국에서 장애인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 기쁘게 했다고 한다. 연예인을 보고 싶다거나, 시각장애인이 자동차를 운전해 보고 싶다는 등의 꿈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별로 가치롭지 않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절실한 꿈이 있다면 이는 매우 소중한 일이다. 병원에서 암투병을 하는 사람이 평소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는 꿈을 이룬다면 효용이 없어 보이는 꿈이 큰 용기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에서의 꿈은 하나의 유행이며, 트랜드이고, 패러다임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꿈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꿈이 아니라 권리를 인정하고, 환경을 만들어주고,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싶다고 꿈을 말하지 않지만 영양분과 햇빛과 물을 주듯이 장애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면 굳이 꿈을 물어보지 않아도 되고, 꿈을 주었다고 주는 자의 허세나 선행의 만족감보다 저절로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이다.

꿈은 달콤하다. 차라리 쓰디 쓴 현실을 치료하는 당의정과 같이 사탕발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꿈을 주기보다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 그러니 꿈을 가지라고 강요당하거나 꿈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나는 지금 현실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꿈을 꾸고 싶지 않다. 그냥 오늘에 충실할 뿐이다. 다가온 새해나 다가오는 선거에서 난무하는 꿈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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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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