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이응이가 한 달 정도 계속 병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 감기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주말 내내 기침이 점점 심해지기에 월요일 아침임에도 부랴부랴 일찍 준비를 한 후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요즘 독감이 대유행이라고 하더니, 병원 오픈시간 즈음이었음에도,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미 소아과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응이가 대기명단 전광판을 읽어주기로는 족히 40명도 넘는다고 했으니까, 내가 아침에 아이와 병원에 갔던 중에는 가장 사람이 많았던 날이었다.

보통, 나와 이응이는 워낙 부지런하고 미리 준비하는 성향이라, 아침에 병원을 갔다 유치원에 등원하게 되더라도 지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날은 지각이 불가항력적이기에 어마어마한 대기 인원을 보자마자 유치원에 전화를 드려 조금 늦게 등원하게 될 것을 알렸다.

대기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지만, 이응이는 이제 아기가 아니기에, 요즘 푹 빠져 있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며 잘 기다려 주었고, 나는 아이 키보다 높이 꽂혀 있는 책을 뽑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아이가 읽고 싶다며 뽑아 달라고 하는 책이 정확히 뭔지 난 당연히 안 보이므로, 일단 추정되는 책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면 아이가 스무 고개를 해서 원하는 책을 알려줘야 한다는 난관(^^?)이 있긴 하지만… 뭐 이런 것쯤은 우리 사이엔 별 일도 아니다.

이렇게 책을 읽다 보니, 드디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진료실 입성!

내가 봐도 뉘 집 아들인지 사위 삼고 싶을 만큼 멋지고 (결혼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 영 모르겠다. 이응아! 좀 여쭤보면 안되겠니?^^)

아이들에게도 너무도 친절하신 Mr. Right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마치고 약국으로 향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최근 독감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여 병원에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바야흐로 Flu Season이 온것이다. ⓒfreepick

내가 많이 망설이다가 글을 써서 여론조사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병원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니, 그 인구밀도가 고스란히 약국으로 전이되는 건 당연한 이치일 터. 약국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고민에 빠졌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오늘은 약을 타 달라고 부탁하지 말아야 하나 그나마, 앉을 곳이라도 있어야 느리더라도 내가 혼자 약을 탈 수 있는데, 앉을 곳도 없고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눈치도 보이고…’

이런 저런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겠기에, 나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약사님께 평소처럼 약을 좀 타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약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님! 안되겠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완.전.당.황.

이 약국 약사가 몇 달 전에 바뀌었고, 나는 그 때 몇 번 약국을 다녀 본 후,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배려를 좀 구해도 될 것 같기에 약병을 주실 때 먹여야 할 용량에 해당되는 눈금에 펜으로 표시를 해 달라고 부탁도 드렸던 곳이었다. 그러니 내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고민 끝에 말씀 드렸던 건데…아무리 시크한 나이지만, 솔직히 마음이 안 좋았다.

물론, 나는 약사님의 상황과 심정을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오늘따라 약국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렇게 바쁜데, 저 사람은 하필 이럴 때 와서 나를 난감하고 번거롭게 만든다.

너무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는데,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다른 손님들에게 컴플레인이라도 들으면 어떻게 하나?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 사람을 도와줄 여유 같은 건 내게 없다. …

그럴 수 있다.

나는 휠체어도 타지 않으며, 시각장애인이라는데도 멀쩡히 걸어다니는 데다가, 잠깐 봐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

하지만…

저시력인 나, 약병 눈금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아무 곳에나 서서 약을 들고 보면서 약병에 부을 수도 없는 내가, 앉을 곳조차 없는 그 약국 안에서 약을 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고 약을 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약을 들고 유치원을 지나 다시 집으로 가는 것. 집에 가서 편한 보조기기를 활용해서든, 극단적으로 밝은 조명 아래에서든 약을 타면 된다. 하지만, 아이는 병원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이미 지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나는 적어도 그 약사님과 나와의 관계 정도라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거라고 믿고 어렵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었던 건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다.

보통의 아이들 약병에 있는 눈금은 잘 보이지도 않고, 약은 특히나 더 조심스러운 것이기에 약사님의 거절은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은진슬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거절당하는 건 별 일도 아니다. 이런 것에는 이미 40년 간 단련되어 이골이 나 있기도 하고…피해의식 같은 것도 없으며, 그 사람의 속사정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내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

아이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는 내가 정중하게 약사에게 부탁하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다 보았다.

보통, 이응이는 이런 상황이 되면 투명인간모드로 변신하는 듯하다. 언어와 상황판단능력이 빠르고 영민한 아이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스폰지와도 같은 두뇌와 민감한 마음으로 모든 걸 담아 둔다. 그리고 그것을 알약을 삼키듯 꿀꺽 삼킨다.

완전히 ‘난 아무것도 몰라요. 못 들었어요.’ 모드다. 하지만, 언젠가 불쑥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때, 아이는 솔직한 마음을 살짝 들려준다. 그 때 조금 속상했다고… 엄마가 거절당하고, 거부당하는 모습을 아이가 보고 아플까봐 나는 아팠던 것이다.

약을 타는데 걸린 시간..... 단 30초이다. ⓒ은진슬

얼마 후, 약이 나왔고, 내가 받아서 가져가려고 하자 갑자기 약사님은 다시 약을 타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감정 없이 괜찮다며 두 번 거절했다. 하지만, 그 분도 그래 놓고는 불편했던지 직원에게 약을 타라고 시켰다. 더 이상 거절하기도 그래서 그걸 바라보며 시간을 새겨 보았다.

1, 2, 3, 4, ….

약 30초가 걸렸다.

꼭 약을 타 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조제약을 계산하면서 갑자기 생각난 다른 약이나 밴드 같은 걸 골라 함께 계산하게 되더라도 이 정도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크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라 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에, 지금 당신의 생각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미국에서 지낼 때만큼의 맘 편함, 당당한 느낌, 척박한 한국 땅에서 길들여진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도 되나 싶게 만드는 그런 배려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아이 앞에서 거절당한 내 마음이 아프고, 엄마가 거절당하는 걸 보며 마음 아팠을지 모를 내 아이의 마음도 아프다.

약국이 슈퍼마켓이나 마트는 아니지 않나?

상황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약국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픈 사람들일 텐데…

약사님의 강팍하고 여유 없는 마음이 조금은 아쉬운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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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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