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평소처럼 자기 전에 감사노트를 쓰고는 방 불을 끄고 아빠, 엄마, 이응이가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어둠속의 책 읽기’(Reading in the Dark)를 시작했다.

아이가 처음 읽을 책으로 고른 건, 미야니시 타츠야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고 녀석 맛있겠다’였다.

미야니시 타츠야의 ‘고 녀석 맛있게다’ 표지 ⓒ네이버 책

워낙 유명한 그림책이고, 나도 무척 좋아하는 책이다.

2003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나, 일본에서 15만 부가 넘게 팔리게 되면서 현재까지 열권이 출간된 시리즈가 되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어린이 책의 스테디,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책들 하나 하나가 각각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랑, 우정, 이별, 슬픔 같은 다채로운 감정들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담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아이와 깊이 나누기 어려운 가슴 속 내밀한 감정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공감해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지닌 멋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쾅쾅쾅, 부글부글, 빠가닥 화산폭발과 지진이 일어난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갓 태어난 안킬로사우루스 맛있겠다와 ‘맛있겠다’를 잡아먹으려다 얼떨결에 아빠 노릇을 하게 된 티라노사우루스.

육식공룡인 티라노는 자신과 전혀 다른 초식공룡인 ‘맛있겠다’를 자신이 알고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보살피며 보호한다.

또한, 훗날 혼자 살아갈 ‘맛있겠다’를 위해 생존을 위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맛있겠다’도 이런 티라노 아빠를 의지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빠 같은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맛있겠다’가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티라노는 아픈 마음을 숨기며 ‘맛있겠다’를 떠나보낸다는 이야기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육식공룡 아빠와, 초식공룡 아들의 이야기 ‘고 녀석 맛나겠다’ ⓒ'고녀석 맛나겠다'

초식공룡 아기 안킬로사우루스와 육식공룡 아빠 티라노사우루스의 조금은 기묘하고 낯선 만남과 동거를 보며 나는 엄마인 나와 내 아이와의 만남을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 아빠들은, 내게 찾아온 아이, 내 뱃속에 열 달을 품은 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나와 비슷할 거라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나와 남편의 유전자의 기이한 조합을 통해 태어난 이 아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극히 새로운 별개의 객체라는 사실을, 우리 부모들은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육식공룡 티라노 아빠는 초식공룡 ‘맛있겠다’에게 자신이 먹어 온 맛있는 고기를 권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먹어야 하는 것은 고기가 아닌 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비록, 자신이 태어나 지금까지 먹어본 가장 맛있는 최고의 음식이 고기였을지라도, 아빠 티라노는 ‘맛있겠다’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이 아닌, ‘맛있겠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다.

아이와 함께 책 속의 티라노 아빠와 맛있겠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아이에게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지,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지 한 번 더 자문하며 반성해 본다.

현재 책은 총 10권으로 사랑, 이별, 슬픔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네이버 책

한편, 이 책 속에는 ‘맛있겠다’가 티라노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빨간 열매’가 나온다.

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티라노 아빠를 위해 맛있겠다는 저 먼 산까지 가서 ‘빨간 열매’를 따온다. 하지만, 사라진 ‘맛있겠다’를 걱정하던 티라노 아빠는 버럭 화를 내고, ‘맛있겠다’는 잘못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맛있겠다’를 달래고 ‘빨간 열매’를 입에 쏙 넣은 티라노 아빠는, ‘고맙다, 맛있겠다야. 참 맛있구나.’라고 말한다. ‘맛있겠다’는 다음 날부터, 아침마다 티라노 아빠를 위해 ‘빨간 열매’를 따러 간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내 아이가 내게 건네는 ‘빨간 열매’를 알아보지 못하고는, 위험하다, 안된다, 다친다고 야단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에게 건네는 ‘빨간 열매’는 무엇인지?

늘 함께 하는 엄마가 뭐 그리 대단하고 보고 싶다고 하원할 때마다 더 없이 반가워하며 웃으며 안기는 아이의 모습.

맛있는 걸 해 주면, 엄지를 들어 보이며 엄마는 요리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아이의 모습.

너무나도 뜬금없이 불쑥 다가와 ‘엄마 사랑해!’라고 말해 주는 아이의 사랑 고백. …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지극히 사소한 표현들…이응이가 내게 주는 귀하디 귀한 ‘빨간 열매’다.

아이가 우리에게 주는 ‘빨간 열매’를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당연하게 여기지도 말며,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찾아내고 맛보고 감사하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맛있겠다’와 티라노의 모습을 담은 영화의 한 장면 ⓒ ‘고녀석 맛나겠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는 모든 엄마, 아빠들이 한 결 같이 너무나도 가슴 뭉클하다고, 마음이 아릿하고 슬프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맛있겠다’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으며, 이제 스스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티라노 아빠는 어느 날 밤, ‘맛있겠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말한다. 싫다고 울며 아빠와 살거라고 매달리는 ‘맛있겠다’에게 티라노 아빠는 아픈 마음을 숨기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저 산까지 누가 빨리 달리나 내기하자. 만일, 네가 나를 이긴다면, 쭉 함께 있어 주마.’

여섯 살 이응이도 ‘맛있겠다’를 떠나보내기 위해 티라노 아빠가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맛있겠다’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라노 아빠를 이기기 위해, 아빠랑 함께 살기 위해 맛있겠다는 온 힘을 다해 산만 바라보며 달렸다. 그렇게 아프게 ‘맛있겠다’를 떠나보낸 아빠는 잘 가라는 인사를 읊조리며 ‘맛있겠다’가 준 빨간 열매를 입에 넣는다.

아팠을 마음을 차분히 갈무리하시며 누구보다 세게 나의 등을 떠밀고, 내가 힘들 때 소리 없이 나의 곁에 함께 있어주셨던 어머니.

이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멋지고 늠름한 스무 살 청년이 된 이응이의 모습과, 사랑하는 내 아이를 티라노 아빠처럼 떠나보내는 내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어느 날, 장애를 가진 내가 세상 속으로 혼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게 하기 위해 티라노 아빠처럼 눈물을 삼키며 나를 떠나보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악기를 배웠던 탓에, 나는 장거리 레슨을 가야 할 일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내 수준에서 배울 수 있는 점자 악보도 없었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그 때. 이런 상황과 모든 것에 답답증을 느끼며 피아노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당시의 내게,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쁜 연습용 플룻 하나를 선물해 주셨다. 내게 피아노를 계속 쳐야 한다는 강요도 없었고, 잔소리도 없었다. 그냥 기분전환 삼아 이거나 한 번 해 보라는 식이었다.

그 때 플룻 선생님은 성북동에 사셨고, 나는 인천에 살았다. 그런데, 첫 레슨을 가던 날, 엄마는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함께 갈 수 없겠다며 인천에서 성북동에 있는 선생님 댁까지 가는 법을 자세히 알려 주셨다. 먼저 가서 레슨을 하고 있으면, 엄마가 일을 마치시고 레슨비를 가지고 오시겠다는 거였다.

나는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길이라도 잃어버릴까봐 엄마가 가르쳐 주는 걸 한 마디도 빼 놓지 않고 외워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석계역에서 길을 건너 825번을 타고 육교 앞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하셨다.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석계역까지 가서, 사람들에게 825번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고, 버스번호도 잘 보이지 않아 긴장하면서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엄마가 말씀하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런데, 거기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의 엄마가 있었다. 나를 안아주며, 잘 했다고, 고생했다고 울먹이는 엄마가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실, 엄마는 나를 먼발치에서 따라왔던 것이었다.

앞으로 장거리레슨을 계속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따라다니기 보다는, 스스로 오가는 연습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시각장애를 가진 초등학교 4학년 딸인 나를 시험해 보고 훈련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 때, 울면서 나를 안아주며,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 준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우리 엄마는 늘 그런 분이었다.

이제 엄마가 된 나는, 비록 그 마음 다 헤아릴 수 없어도, 조금은 엄마 마음을 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애간장이 녹아 내렸을지, 그래도 엄마는 그런 마음을 차분히 갈무리하시며 늘 다른 친구들보다 더 일찍 더 세게 나의 등을 떠 밀며 떠나보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내가 힘들 때, 장애로 인해 어찌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내 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엄마는 어느 새 소리 없이 나를 도와주고 위로하며 늘 함께 있어 주셨다.

이런 엄마가계셨기에 나는 매우 독립적인 강철멘탈의 소유자로 자라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와 책을 읽으며, 이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과연, 나는 나의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내 아이의 때가 되었을 때, 담담하고 의연하게 눈물을 삼키며 기꺼운 마음으로 아이의 등을 떠 밀며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 아이가 힘겨울 때, 어찌하지 못할 괴로움과 슬픔의 심연으로 침잠해 있을 때, 그 아이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키운 엄마가 내게 그렇게 해 주었기에.

나도 나를 키운 엄마같은 엄마가 되고 싶기에.

‘고 녀석 맛있겠다’ 속의 멋진 티라노 아빠처럼, 장애를 가진 나를 그 누구보다도 잘 키워 주신 멋진 나의 엄마처럼…

나 역시, 내 품을 떠날 때가 된 아이를 기꺼이 떠나보낼 수 있는 엄마, 내 품이 필요한 아이를 결코 떠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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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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