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지난 8월 25일 작성된 '우리 아이 한글교육의 적기는 언제일까?_Part 1: 사교육의 쓰나미 속에서 엄마의 중심 잡기'와 연결되는 내용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적기 교육,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살며시 곁에 두기만 하면 된다. ⓒ은진슬

그 후로 아이의 사인을 기다리며 지낸 지 어느덧 1년! 2015 년 5월초,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유치원 등원 준비를 하며 EBS 딩동댕 유치원을 시청하던 아이가 <한글이 야호 2> 프로모션 광고를 보더니 불쑥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한글이 야호> 사줘. 저거 하고 싶어.’

‘그래? 저거 글자 읽는 거 배우는 책인데, 저거 사면 엄마랑 같이 하고 싶을 때마다 한글 공부 할 거야?’

‘어, 나 할거야.’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 남편과 의논을 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한글을 읽게 되면 그림을 보며 상상할 수 있는 자유와 창의적 사고를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너무 일찍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드디어 아이 스스로 한글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며 알기를 원하는 그 날이 온 것 같다고, 당신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한글이 야호 2>에 관해 검색을 통해 정보를 찾아 본 후, 구매해서 함께 해도 괜찮겠다는 의견을 보태 주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 집에 한글 교재가 입성하게 되었다.

아이의 한글 선생님이 되어주고 있는 '한글이 야호' ⓒEBS

이응이의 한글선생님이 되어주고 있는 <한글이 야호2>는, 5월 첫 주부터 매주 금요일 오전 8시 35분에 방송되었는데, 일찍 일어나는 아이의 성향상 본방 사수가 가능할 것 같았으나,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그 달에 아이는 장염에 연달아 찾아온 수족구로 보름 정도 유치원 등원을 하지 못했을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인터넷 다시보기로 놓친 프로그램을 보여줄까도 했는데, PC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너무 일찍 아이를 노출시키게 되는 것 같아 그냥 본방 사수가 안 되면 그걸로 끝내고 책과 워크북만 함께 하는 걸로 정했다.

아이의 컨디션 탓도 있었고, 처음부터 하루 몇 분씩 하자고 아이를 굳이 옥죄어 스트레스를 줄 필요도 없겠다 싶어 그냥 아이 눈에 잘 띄는 소파, 침대, 아이용 책장 등 여기저기에 올려 놓고는 궁금할 때나 심심할 때 아이가 가져오면 읽어 주기도 하고, 주말에는 아이가 원할 때만 아빠가 아이가 좋아하는 스티커 붙이기나 선긋기 같은 것 위주로 워크북을 간간히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니, 아이는 <한글이 야호>를 엄마표 학습지나 공부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저 또 하나의 놀잇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뭔가를 자기가 하고 있다는 게 무척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식사 준비나 설거지 등을 하느라 놀아 주지 않을 때, 평소 심하게 관계 지향적이며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해서 둘러보면, 책을 읽는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불량한 자세로 소파나 침대 같은 곳에 널 부러져 한글이 야호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종종 관찰되곤 했다.

이리저리 다양한 포즈로 책을 읽는 아이. ⓒ은진슬

아이가 언제까지 한글을 깨치게 하겠다는 가열찬 목적도, 계획도, 실행도 딱히 없었으니, 당연히 어떤 변화나 눈에 띄는 결과를 기대한 적도 없던 내게 뜻밖의 선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지난 8월 3일이었다.

무척 덥고 습했던 날로, 이응이는 그날 날씨를 찐덕찐덕한 초콜릿 같다고 표현하였다. 아이와 함께 기관지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와서, 다시 절친한 대학 후배 아들의 백일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에 가서 아기 선물과 이응이 옷도 사고,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점에 가서 돈까스도 먹었다.

어둑어둑한 저녁,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아이가 내게 불쑥 물었다.

‘엄마, 부동산이 뭐에요?’

‘부동산? 그건 집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곳인데, 왜?’

‘아까 들어올 때 집 앞에 써있었잖아!’

그랬다. 아이가 부동산이라는 글씨를 읽은 것이었다. 이게 부동산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 이름이나, 익숙한 장난감의 이름이었다면 나는 아이가 한글을 읽었다고 간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이라는 단어는 어른들이 매일 사용하는 일상어도 아니며, 다섯 살 아이에게 부동산에 대해 말하는 엄마는, 아마도 엄마나 아빠의 직장이 부동산인 경우 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일주일 전쯤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문득 플래시 영상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가갸거겨…’ 한글판이 붙어 있는 걸 보신 우리 엄마, 이응이에게 읽어 보라고 하셨는데, 이응이는 당연히 잘 못 읽었다.

그러니 쉬크한 우리 엄마가 남긴 한 마디!

‘아이고! 우리 이응이 언어는 청산유수인데, 왜 아직 한글은 못 읽니? 어서 읽어야지.’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아직 다섯 살인데, 뭐 벌써 한글을 읽으라고 해?’

그랬다. 그때만 해도 이응이는 받침 있는 글자는 읽지도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새 갑자기 ‘부동산’을 읽다니…

아이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때의 기분은,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와 비견될 만한 가슴 벅찬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냉정한 내 성격상, ‘부동산’ 하나에 한글을 읽는다고 단정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혼자서 작은 감동을 마음에 간직하며 조용히 넘어갔는데…

다음 날, 더 큰 감동의 물결, 확신의 증거가 찾아왔으니…

정말로 오랜만에 절친 대학 후배를 만나러 후배 집에 놀러 갔었다. 얼마 전, 셋째 아이의 아빠가 된 후배와 와이프, 세 아이들을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이 설레어 아이들에게 줄 쿠키도 굽고 몸 풀고 수유하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많을 후배 와이프를 위해 해물 잡채도 만들어 바리바리 싸가지고 머나먼 의정부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응이도 형아들과 신나게 놀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기를 보며 자신도 저랬냐며 신기해하였고, 나 역시 후배와 후배 와이프와 이런 저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하며 힐링을 하는 시간이었다.

후배도 나와 같은 시각장애를 가지고 아이 셋을 너무도 잘 키우는 육아 선배님이시라 늘 이야기도 잘 통하고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서 할 이야기도 참 많았기에, 생각 같아서는 머나먼 곳까지 왔으니 하룻밤 자고 오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하지만, 나도 다음 날 일을 해야 했고, 신생아가 있는 집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될 것도 같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후배 와이프가 근처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어 우리는 집을 향해 머나 먼 여행을 시작했는데…

낯선 환승 지하철역인 도봉산역에는 밤 9시도 안 되었음에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이정표를 볼 수 없는 내가 낯선 지하철역에 오니 정확히 어느 승강장으로 가야 서울 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탈 수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어 두리번거리니 이응이가 물었다.

‘엄마, 여기 어떻게 가는지 잘 몰라?’

‘어, 처음 오는 곳이라 잘 모르겠으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봐서 찾아 가자.’

이렇게 대답을 하는데, 아이가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외치며 앞으로 막 뛰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한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엄마, 인천, 수원 방면은 1호선인데 왼쪽으로 가야 되고, 온수, 부천 방면은 7호선인데 오른쪽으로 가래. 나 따라 와!’

‘우아! 이응이 정말 한글을 잘 읽네. 고마워. 가자.’

도봉산에서 신도림까지 가야 하는 기나 긴 지하철 여행에서도 아이는 탄력을 받았는지 지나가는 지하철역을 마구 읽어 대기 시작했다.

‘월계, 광운대, 성북, 종로5가…’

옆 자리에 앉으신 어르신들은 몇 살이냐, 똑똑하다며 마구 칭찬 세례를 하셨고, 덕분에 아들은 기나 긴 지하철 여행을 졸려 하지도 않고 사기충천, 의기양양, 위풍당당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10시 반.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남편도 조금은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남편 역시 기대가 전혀 없었기에 더더욱 뜻밖의 선물인 듯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아이가 갑자기 하루 이틀 사이에 오늘부터 나는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아빠, 엄마 소리를 들을 때와 비슷한 기쁨을 누리게 해 준 멋진 경험이었다.

후배 내외에게 잘 들어갔다고 전화를 하면서 이 얘기를 하니, 그 녀석 똑똑하다며 이제 든든하게 데리고 다닐 만하겠다고, 축하한다는 농담을 건넸다.

사실, 내가 이응이를 키우며 대할 때 조심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이의 눈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싱글 시절 어쩌다 시각장애 부모들을 접해 보면, 서 너 살 정도 밖에 안 된 아이에게 시각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의 짐이 너무 무겁겠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모라고 해서 완벽할 수는 없기에 어떤 사정으로 아플 수도, 약할 수도, 경제적 약자일 수도, 장애를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란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아이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보호자이자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장애엄마로서의 내 육아 철학이다.

아이가 부모의 장애와 그에 따른 불편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고, 이해하며 받아 들여 스스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인지와 이해와 공감 및 실질적 신체 능력이 될 때는 얘기가 다르지만, 아무리 부모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유아기 때는 너무 이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가르치지 않았어도 18개월부터 숫자를 읽기 시작한 이응이였음에도, 같이 버스를 탈 때 제대로 버스 번호도 못 보는 나였지만 아이가 3, 4세가 되도록 버스번호 한번 물어본 일이 없었다.

한 번 성능 좋은 아이의 눈을 빌리면 그 편안함과 달콤함에 젖어 계속 아이에게 의존하게 될지 모르고, 아이는 엄마와의 즐거운 나들이 때마다 자신이 긴장하며 버스 번호를 봐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늘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아이가 주도적으로 나의 불편에 공감하며 도와주고, 그것에 자부심도 느끼는 나이가 되었으니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에게 조금은 유연하게 손을 좀 내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아이가 지금보다 한글을 술술 더 잘 읽게 되더라도 읽기 독립은 초등학교 가고 나서 시켜야겠다는 다짐도 되뇌어 본다. 괜히 아이가 한글 좀 알게 됐다고, 확대경으로 책 읽어 주기 힘들다고, 점자책 구해서 읽어 주는 게 힘들다고 아이와 책 읽는 일에 나 스스로가 게으름을 피울까봐 미리 다짐해 두는 것이다.

한글을 스스로 깨우치고 있는 아들에게 쓰는 편지. ⓒ은진슬

아들이 한글을 깨치니 좋은 게 또 있다. 9월부터는 아이 기분이 좋지 않거나, 내가 일을 하러 갔을 때 집에 돌아온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더 느끼며 위로 받을 수 있도록 편지를 써 놓을 수 있다는 것. 글씨 쓰는 건 정말 싫다기에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뜻 밖에 답장까지 써 주니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지금은 마음껏 야무지고 똑똑한 아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을 즐겨야겠다. 머지않아, 아이가 한글을 아주 잘 읽고 책도 좋아하는 멋진 청소년이 되면,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속의 미하엘과 한나처럼 아들과 내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아들에게 멋진 목소리로 낭독해 달라고 해 보고 싶다. 내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 주었으니, 이 정도는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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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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