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박물관에서 뇌병변장애 아동의 특수유모차 출입을 금지시킨 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물관장은 대형유모차나 휠체어가 관람객들의 이동에 불편을 준다는 민원이 있으므로 소형 유모차로 갈아탈 것을 권하였고, 장애 어린이가 유물을 보느냐는 되물음을 하였다.

박물관장의 무례함이나 차별적 태도는 우선 차치하고, 나는 그의 장애에 대한 무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뇌병변장애는 뇌성마비 외에도 뇌졸중, 파킨슨병이나 스티븐 호킹 박사의 루게릭병까지 뇌손상 등으로 인한 운동장애와 감각장애를 포함한다. 목가누기부터 걷기 등 신체조절 뿐 아니라, 얼굴표정의 움직임이나 발음, 발성, 음식을 씹고 소화하는 기능까지 다양한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지적장애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이들이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문학과 과학, 예술 등 지적 분야에서 성취를 보이며, 행정이나 교육 등 여러 직업군에 속해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박물관장은 장애아동의 신체 기능을 대신하는 특수보조기구로서의 유모차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관장은 그날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유모차와 휠체어만 고집하는 약자의 갑질’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리고 겉보기에 신체조절과 언어표현이 안 되는 장애인은 지적능력이나 욕구조차 없을 거라고 단정하듯 “그 어린이는 유물을 못 봐요.”라고 JTBC 인터뷰에서 당당히 말하였다. 이러한 무지는 박물관장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얼마 전 특수학교의 통학버스에서는 중증의 근육발달 장애아동의 사망사건이 있었다. 반사신경이 없고, 목 가누기가 안 되는 아동에게 좌석의 목받이를 젖혀서 앉혀주어야 했는데, 그날 동승했던 보조교사는 아동의 고개가 떨구어져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도 별 일 아닌 듯이 지나치는 바람에 질식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총선 때 투표장에서 한 뇌병변장애인은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으로부터 인지테스트를 요구받았고, 그 모멸감에 투표를 포기하고 나온 일이 있었다.

이 모두가 공공기관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박물관장, 특수학교 보조교사,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그들에게 장애인을 대하는 기본매뉴얼이 없었을까? 있었는데도 교육받지 못했던 것일까? 공공기관의 무지는 국가와 국민 전체의 무지를 대표하는 것이며, 이는 인권적 차별을 넘어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고와 위험으로 나타난다.

그나마 육안으로 분별하기 쉬운 뇌병변장애에 대해서도 이렇게 무지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발달장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의 아들이 특수학교를 다니다가 일반초등학교로 전학 왔을 때, 학급의 친구들은 하교 때마다 달려와서 물었다.

“아줌마, 영빈이는 외국인인가요?”

“말을 못하던데 목이 아픈가요?”

“머리가 아프다던데, 수술을 했나요?”

아이들은 차별적 시각이 아니라 순수한 관심으로 아들의 장애를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대장노릇을 하며 아들을 집단적으로 때렸던 한 남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영빈이가 나를 보고 자꾸 웃었어요. 그거 비웃는 거잖아요. 그래서 때렸어요.”

“너하고 놀고 싶어서 웃은 거야. 말을 못하니까 그렇게 관심을 보인 거야.”

“그래요? 그런데, 싸움도 할 줄 몰라요? 왜 맞고만 있어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무지와 편견 속에 길들여진 부조리한 사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학급에 장애이해교육을 부탁하고 학교신문에 아들의 특성과 상호 성장할 수 있는 대안들을 편지글로 실었다. 이후 많은 학부모들과 친구들이 응원해주었다.

폭행의 대장노릇을 했던 아이는 아들의 보디가드가 되어주었고, 아들이 운동장에서 혼자 뛰다가 넘어져 다쳤는데도 친구들은 누가 때린 상처냐면서 의기투합하여 현장조사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의 말 한마디, 낙서 한 장의 발전에도 박수치며 앞 다투어 칭찬해주었다.

아들의 빵점짜리 시험지를 보며 틀린 답이라도 써냈다는 것에 기뻐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자신의 50점, 60점 시험지를 들고 와서 자랑하기도 하였다. 나는 아들의 발전과 함께 그 아이들의 발전도 기꺼이 칭찬하였다. 가장 약한 자를 품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다. 모두가 타고난 그대로의 다양한 기질과 능력대로 존중받고, 두려움 없이 실수와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박물관장과 특수보조교사와 선관위 직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들의 무지를 묵인하고 방치한 진원이다.

나 또한 아들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발달장애의 세계를 홀로 밑바닥에서부터 체험하며 겨우 알고 나니, 이제서야 다른 유형의 신체장애 등에 대한 무지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내 명함엔 점자가 없고, 내 폰엔 음성과 문자 전환앱이 없고, 배리어프리 영화가 뭔지, 유니버설 디자인이 뭔지 나는 여태 몰랐다. 장애란 약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소수의 약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과 인식의 문제임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왜 나는 학교 다닐 때 장애친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는가. 왜 장애인시설과 특수학교는 저 멀리 외딴 곳에 지어져 있는가. 왜 장애인들은 집 밖을 나서자마자 계단에서 버스에서 타인의 시선에서 좌절해야 하는가. 왜 장애아를 낳은 부모는 수치와 낙담으로 절망해야 하는가.

이것은 장애인들만의 고통이 아니다. 성적을 비관하고 왕따로 자살하는 청소년들, 많은 돈을 가지고도 허기진 듯 투기와 뇌물로 집착하는 어른들, 평생 인공지능보다 못할 지식과 기술을 맹목적으로 좇으며 서로를 비교하고 소외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고통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경쟁이나 외형적 성취가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이다. 약자를 품는다는 건 우월자가 열등자에게 베푸는 수직적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다. 타인의 약함을 안다는 것은, 자신 또한 약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감추었던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일련의 과정이며, 상호보완적인 공존의 타자로서 손을 맞잡는 것이다.

IT와 건축, 문화와 예술, 교육과 정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장애를 인식함은 모든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며,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는 건강한 사회로의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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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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