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그 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회복지정보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사업가 한덕연 선생이 필자가 한국농아복지회 전북지부의 간사로 근무중일 때 기관방문을 하였다. 정확하지 않지만 1980년대 말이나 1990대 초쯤으로 기억되는데 지부장과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요청을 하여 사무실이 아닌 조용한 커피숍에서 한덕연 원장, 지부장, 필자 이렇게 셋이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필자가 통역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수화통역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간사로 불려지며 협회의 행정과 통역, 회계 등 전천후 업무를 수행하던 시기로 필자 또한 수화통역사라는 전문가로서의 개념이 형성 되어 있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청인(한덕연 원장)의 한국어를 수어로 통역하고 농인(지부장)의 수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데 한덕연 원장이 농인 지부장에게 “ 지부장님, 수화통역 하는 분을 바라보지 마시고 저를 바라보면서 얘기해 주십시오” 하는 요청을 하였다.

필자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통역을 하면서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바도 없었으며 청인을 바라보며 수어를 하는 농인도 보지 못하였고 농인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청인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는 청인을 만난 적 또한 처음이었다.

농인과 청인의 중간에서 통역을 하면서 보면 수어를 하는 농인도 수화통역사만을 바라보며 수어를 하고 있고 한국어를 하는 청인도 대화의 당사자인 농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수화통역사를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즉 대화의 당사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개 역할을 하는 수화통역사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지부장도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의식적으로 대화의 당사자인 한덕연 원장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워낙 오랜 습관 탓인지 자꾸만 통역을 하는 필자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한덕연 원장은 단 한순간도 통역을 하는 필자를 바라보지 않고 대화의 당사자인 농인 지부장만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막 농사회에 발을 디디며 걸음마를 시작하던 필자에게 그 날의 기억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누는 시선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실재 많은 언어학자들이 비언어적 요소가 소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누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화의 주체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화의 주체인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수화통역사를 바라봄으로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화통역사가 대화의 주체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경험 이후에도 대화의 당사자인 농인과 청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런 풍경이 모두에게 낯설고 익숙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고 대화의 주체인 당사자들이 소통에서 시선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농인과 청인이 수화통역사가 중개하는 상황에서 소통을 하게 될 때는 수화통역사를 바라보지 말고 대화의 당사자인 상대방을 바라보자. 그리하여 대화의 주체가 수화통역사가 아니라 농인 당사자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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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칼럼리스트
한국농아인협회 사무처장으로 근무했다. 칼럼을 통해서 한국수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이 일상적인 삶속에서 겪게 되는 문제 또는 농인 관련 이슈에 대한 정책 및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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